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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1 캐롤라인 A. 최
  2. 2013.12.11 Hortalitium
  3. 2013.12.11 The Prototype
  4. 2013.12.11 송림
  5. 2013.12.11 프로그램 "아발론"
  6. 2013.12.11 아바타
  7. 2013.12.11 131210
  8. 2013.12.11 [맥윌]
  9. 2013.12.11 침묵의 요람
  10. 2013.12.10 연성용 링크 11

2013. 12. 11. 16:17 플필

캐롤라인 A. 최

캐롤라인 A. 최Caroline Anna Choi


여자

5.1ft. / 105.9lb.

평범한 고등학생→대학생이 되었다.

1994. 12. 25 (2012년 4월 12일 기준, 만 18세)

 

  아버지는 재미 교포 2세(애널리스트), 어머니는 American-French(성형의). 캐롤라인은 장녀이고 양친과 여동생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틀란타의 롱 레이크Long Lake에서 어머니 여동생 부부-Jeremiah P. / Johanna T. Parkers-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그들 부부는 홈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음.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캐롤라인이 태어난 집은 롱 레이크가 아니라 스와니 리버 지구에 있다.


  아시안 계통이 섞인 것 치고는 상당히 밝은 피부 톤을 가지고 있지만 백인들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래된 송수피松樹皮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그냥 볼 때엔 검정색이나 다름 없지만 빛을 받으면 짙은 갈색이다. 타인이 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옆머리(겸 앞머리)가 있다. 머리는 선천적인 직모로 날개뼈에서 한 뼘 정도 더 아랫부분까지 기른 상태. 최근엔 금발로 염색을 했을 하고 굵은 웨이브를 넣었다. 얼굴은 외국에서 대체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동양인 상. 눈이 약간 위로 올라가있고 입술은 작고 도톰하다. 이마는 약간 넓은 편. 계란형이다. 코는 낮지 않다고 볼 수 있을 정도. 평소 무표정하게 있을 때가 많다. 얼굴에서 힘을 빼면 입꼬리가 내려가 상당히 저기압으로 보이는 듯하다.


  몸무게에 비해 살이 더 쪄보인다. 옷 고르는 센스가 유난히도 없어 늘 친구들의 도움을 받음. 적녹약시赤綠弱視이다. 자신이 패션 테러리스트인 이유가 이 때문이라 우기기도 하지만 늘 농담으로 치부 당한다. 가장 안정적인 패션으로 손 꼽히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다님. 작은 키 때문에 신발은 대부분 컨버스의 4cm 굽이 들어있는 운동화를 신는다.

 

  학교에 교복이 지정되어 있어 평소엔 학교 교복을 입고 다닌다. 교복은 폴드-칼라fold-colar의 셔츠에 왼쪽 가슴에 주머니가 있고 그 위엔 학교 마크가 세겨져 있다. 청록색 리본과 동색의 스커트, 스타킹에 검정 구두가 드레스 코드. 발 사이즈는 9.3in.

Posted by 토박

2013. 12. 11. 16:09

Hortalitium

  청초한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여인은 간간이 숨을 고르기 위해 '소리'를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내는 경건함이 깃든 표정으로 스크린 너머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스크린에는 확대된 여인의 입술만이 유연한 움직임을 반복한다. 붉고 새초롬해 보이는 입술이었다. 마치 붓으로 그린 것처럼 미려한 곡선을 지닌 그 입술은…… 사내는 제 옆 리모콘을 들어 음소거를 해제시키고 스크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 거친 표면을 손으로 쓸었다. 8개로 분할되어 구성된 스테레오 스피커가 방 안 곳곳에서 여인의 목소리를 흩뿌린다. '그것'은 노래했다. 자신을 구존할 길이 그 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은 돌연 암흑으로 화했다. 톡 하고 펨토칩이 꽂힌 소켓이 스크린 뒤편의 리더에서 튀어나와 카펫 위로 떨어졌다. 소켓에선 회백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플라스틱의 탄 내가 사내의 비강을 훑으며 들어 온다.

  "대단한데."

  사내는 고갤 들어 뒤를 바라본다. 목소리가 들려왔던 곳엔 그를 닮은 또다른 사내가 사라져 버린 스크린 속 가희를 향해 가벼운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옆을 스쳐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펨토칩 소켓을 주워 들었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그것을 집어 커튼이 걷힌 창가에 가져다 댄다. 양광이 투명한 소켓을 투과했다. 관찰을 통해 알아낼 수 없는 것은 그러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직감했다. 불구하고 또다른 사내는 무의미한 그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보석을 감정하듯 찬찬히, 그는 소켓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구한 거지"
  "제41지구."
  "승인이 났나 앞뒤 꽉 막힌 놈들이 그래줄 리가 없는데."
  "대가리에 화엽충(火葉蟲)을 주사해 줄까 물어 봤었거든."
  "누구에게."
  "뒤셀클로마디프 중위."

  말로 했을 리가 없다. 평소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보아 자연스러이 상상되는 광경은 어찌 보면 뻔한 것─사내가 배양된 화엽충을 탄 약물이 든 주사기를 겁나한 중위의 목에 대고 정중히 연구실의 문을 열라 협박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중위는 덜덜 떨리는 손과 입술로 지문과 보이스 체크에 임했을 것이다. 사내는 관찰하던 소켓을 본래 주인에게로 돌려 주었다. 소켓을 돌려받은 사내는 그것을 제 재킷의 앞 주머니 속에 밀어 넣는다. 그는 그것을 두어 번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다름아닌 짧은 질책이었다.

  "내부 회로가 죄다 연소되었어. 그 칩은 차피 카피일 뿐이야, 수야. 보존시킬 가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을텐데."

  수야는 만지작거리던 소켓을 앞주머니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소켓에 붙어 있는 하얀 견출지 위엔 'Noct.07-cp'라는 글자가 고딕체로 깔끔하게 타이핑되어 있었다. 택(tag)의 마지막에 붙은 cp는 아마 카피라는 의미리라 수야는 짐작했다. 그는 홀린 듯 소켓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이미 타버려 까맣게 변해 버린 칩을.
  ─뒷내용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그가 손에 넣은 펨토칩은 군 최고 기밀 사항에 해당되는 물품의 카피였다. 그저 노래하는 여성의 모습만이 담겨 있을 리가 없었다. 수야는 눈을 감았다. 사내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칩은 연구실의 칩 케이스에서 분리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자 자동으로 연소되었다. 어쩌면 영상의 타임바가 어느 정도 지나면 연소되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 간에 영상의 뒷내용을 볼 수 없도록 분명 누군가 조치를 취해 놓은 것임에 틀림은 없었다.

  "수야."

  수야는 눈을 떴다. 사내는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수야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이가 자신을 저렇게 바라본다는 것은 퍽 끔찍스러운 일이다. 마치 거울을 보며 되지도 않는 멋진 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내는 제 손바닥을 펼쳐 수야에게 내밀었다. 소켓을 그에게 넘기라는 뜻이다. 수야는 그러나 고갤 내저었다. 사내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잡히는 것을 그는 그저 그리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손을 거둔다. 머쓱해 보이지는 않았다.

  "솔, '이건' 내가 처리해. 너에게 줄 수 없어."

  퍽 낮은 목소리였다. 짜증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솔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수야가 가진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야 또한 그와 마찬가지일 터였다. 때문에 솔는 어째서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칩은 카피야."
  "알고 있어."
  "그 칩은 연소되었지."
  "그것도 알고 있어."
  "그 칩을 가지고 있다가 '그들'의 눈에 띈다면 넌 아마 마그네틱에 넣어질 거야."

  ─모두들 하나를 죽이기 위해 도끼눈을 뜨고 있으니까. 솔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영사실 내에 감돌기 시작했다. 수야는 손바닥 위의 소켓을 그러쥐곤 응시한다. 차갑고 자그마한 감촉의 소켓은 기분이 좋았다. 다만 그뿐으로, 이제껏 찾아온 것을 손에 넣었다는 감흥은 일지 않은 채였다. 솔는 몇 번이고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다 급히 뒤돌아 영사실을 빠져나갔다. 딱딱한 구둣굽 소리가 뻥 뚫린 복도에 먹혀 들어가며 공기 중의 초음파와 공명하다 소멸되었다. 수야는 호흡을 멈춘 채 점차적으로 줄어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솔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마침내 숨을 들이쉬었다. 영사실은 어두컴컴했으나 걷힌 커튼 덕에 조금은 밝기도 했다. 기실 이 정도의 어둠의 존재는 무관했다. 그는 어둠에 익숙한 이였으니까.
  때문에 수야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다시 쳐 내리곤 영사실을 벗어났다. 그의 발소리 또한 솔의 그것이 그러하였듯, 점차적으로 부스러지다 이내 사라졌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여전히 타 녹아 버린 소켓이 쥐여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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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1. 16:07

The Prototype

  현계에 과연 인격체라 명명된 존재들만큼이나 혐오스러운 것들이 또 있을까. 만일 그렇다 함은 바로 그것이 새로운 비극의 도래이자 또다른 시발의 종극이 될 터였다. 함몰되어 제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는, 계집아의 안구가 워켄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또로록또로록.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해 부정치 못하는 존재였다. 워켄은 프로토 타입의 등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무기질적이기 그지없는 유리알. 주조된 소녀들이 세상을 마주할 방도는 다만 그뿐이었다. 그는 창조자였지만 소녀들이 이 유리 눈알을 통해 어떠한 세상을 바라보는 지 알지 못했다. 안타깝지는 않다. 그것은 그녀들이 이고 가야할 짐이었으니까.

 

  "닥터."

 

  옹송그린 프로토 타입의 등 위로 긴 머리칼이 흐드러졌다. 그녀는 아기가 고롱거리듯 옹알였다. 뼈대만이 남은 얇은 두 손으로 정결한 투피스 드레스의 등 후크를 푼 그녀는 하이얀 등을 드러낸 채다. 물론 등뿐만이 아니었다. 붉게 드러난 상처가 흑백의 세계에서 고고하게 제 자태를 뽐냈다. 기괴하게 뒤틀린 팔이며 거죽 위로 허옇게 도드라진 갈비뼈 따위가 욕지기가 치밀만치로 역겨웠다. 그녀가 앉아 있는 선단 위로 금세 붉은 피가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워켄은 여상한 손길로 그녀의 등 위에 검지를 미끄러뜨렸다. 아파. 아파, 닥터. 아파요. 가녀린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기 시작했다.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생리적인 혐오감을 일으켜.』

 

  ─언젠가 그를 떠나간 동료들이 남긴 말이었다.

 

  『너는 결코 인간을 만들 수 없어, 닥터 워켄.』

 

  그것은 저주이자 희미한 오만 그리고 질투 따위가 뒤엉킨 더러운 감정이었다. 워켄은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결코 자신의 창조물에 기대하지 않았다. 인간을 모방한 메커니즘의 자동 인형은 어디까지나 무생의 존재로서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디딜 수 없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녀들은 인격체가 되어선 아니 되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창조해낸 새로운 죽음에 그런 식의 종지부는 결코 찍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불쌍하지 않은가. 하얀 장갑이 프로토 타입의 상처를 헤집으며 파고든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아아. 일그러진 신음 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닥터를 화나게 할 수는 없다. 때문에 프로토 타입을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던 와중 갈비뼈를 쥐어 잡혔다.

 

  "닥터, 아파."

 

  그녀의 고통은 그러나 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겉켜 뿐인 그 통증은 쉬이 사그라들 터였다. 워켄은 손을 뻗어 소녀의 등 속에 엉긴 라인들을 잡아 뽑아냈다. 프로토 타입은 입술을 앙다문 채 눈물을 흘렸지만 호곡성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자각하고 있었다. 프로토 타입은 입을 벌린 채 잠시간 호흡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내 실이 끊어져 모든 것을 품에서 놓아 버린 마리오네트처럼, 그녀가 앞으로 힘없이 무너져 바닥에 머리를 찧는, 퍽하는 끔찍한 소음이 워켄의 귀를 울렸다. 그녀의 체내에 저장되어 있던 체액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정말 '봇물처럼.' 리놀륨 바닥 위로 깐작하니 점철된 핏자욱이 점점더 퍼져나갔다.

 

  "너에게는 죄가 많구나."

 

  워켄은 프로토 타입의 하나 남은 눈을 감겨주며 가동열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차가운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녀의 종말은 애잔했다. 팔을 뜯기고 안방이 함몰되고 등에는 뼈를 발라내는 자상이 새하얗고 순결했던 신체에 남겨졌다. 수리를 해보아야 그녀의 인공 뇌 내에 저장된 개발 목적-자해를 통한 자가 개발-이 삭제되지 않는 이상 그녀는 또다시 그 비참한 도전을 계속해 나갈 것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주어야 했다. 때문에 워켄은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연구실 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녀에게 그는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다. 그에겐 그러나 창조를 위한 파괴, 다름 아닌 그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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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1. 15:59

송림

  맨 처음 이 한적한 곳에 뿌릴 내렸던 때를 떠올려 본다.

  이곳저곳 관리 되지 않아 시원시원하게 멋대로 가지를 뻗은 나무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조용하고 사람 없는 시골에 정착하는 것이 내게 있어선 인생의 목표들 중 하나였다. 때문에 싼값에 매물로 나온 이 송림松林 터가 그런 내 기대에 부합하기엔 더없이 적합한 곳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이 귀촌歸村이지, 기실은 동면冬眠이 목적이었다. 그 누구도 내게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또 조용히 잠을 자고 싶었다.
  땅을 매입하자마자 곧장 설계도를 작성했다. 대학 시절 몇 번 건축 공사에서 일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당시 인맥들 중 한 명이었던 최 선배를 핸드폰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내 기억 속에 남은 목소리와 똑같은 그것으로 흔쾌히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난 그의 그러한 패기가 과연 몇 세까지 이어질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사흘 뒤 이 구석진 시골까지 내려와 직접 측량을 도왔다. 굴리는 형식의 자와 얇은 0.28 촉의 펜, 그리고 메모 패드.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측량을 하다 말고 허릴 펴며 묵은 등걸들과 그루터기들은 뽑아내는 것이 좋겠다 말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그것은 아니 된다 고갤 저었다. 염퉁머리 없이 저보다 너덧 배는 더 산 노송들과 고사들을 차마 뽑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집터를 줄이고 또 줄였더니 예상했던(내지는 계획했던) 면적의 4분의 3이 채 되지 않았다. 최 선배는 혀를 끌 차며 앞뒤 꽉 막힌 이라 한숨을 내쉬었다. 집은 그러나 결국 설계도를 조금 수정해 착공 되었고, 얼마 뒤 완성 되었다. 그만 해도 1년이 걸렸다.
 

 


  저도 송림의 일부임을 주장하며 땅 위 10cm 정도를, 경토를 닮은 무람한 흙뭉지들이 얼기설기 덮고 있었다. 손톱 크기의 몽글한 그것들은 송수피처럼 붉다. 흙에선 퀴퀴한 낡은 책의 내음과 갓 눈을 뜬 싹의 소리가 났다. 새그무레하면서도 싱그럽다. 이 옥요함은 자연의 순리가 남긴 산물임에 틀림없었다. 손틈 새를 고요히 빠져나가는 누군가의 백골은 곱디 곱다.

  숲속의 이 2층짜리 작은 집이 준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 선배는 망치를 닮은 공구를 들고 집안 곳곳의 기둥을 퉁퉁 쳐댔다. 빈 소리가 나면 속이 삭은 나무이니 집이 무너지기 전에 바꾸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그는 몇 년 전에 뒤지지 않을 만치 활달했다. 오히려 목청은 더 커진 것 같았다. 우리는 집 주위를 걷고 있다. 최 선배는 집의 반절에 걸쳐 있는 구릉지 께엔 기둥을 여럿 세워 바닥을 지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기둥이 드러난 곳을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커다란 나무 토막 하나를 박아 넣지 그랬어."
 
  구릉의 경사에 훤히 드러난 여덟 개의 기둥이 영 꼴볼견이다. 마치 묻혀있던 뼈가 드러난 것처럼.

 

  "그랬으면 네가 더 지랄 떨었을 게 눈에 선한데."
 
  내 타박에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하오의 햇살이 오른편에 그리메를 드리웠다. 나는 솜브레로를 닮은 챙 넓은 모자를 더욱 내려 썼다. 햇볕은 공격적으로 나는 물어뜯고 해체 내지는 분해시키려 들었다. 광자들은 모공 속으로 침투해 혈관을 타고 흐르다 끝내 심방으로 유입되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마치 독한 마취제 같다. 심박수는 점차 그 양을 늘여가고 있었다.

 

  "모자 뒤집어 쓰는 걸 보면 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익살스러운 그의 말에 하하, 하고 선웃음을 터뜨렸다. 최 선배의 말마따나 나는 아직 이 모든 것들의 일부분이 될 채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나는 노송의 굵은 삭정이에 세게 매듭지어 매달아 둔 그네가 좋다. 이미 죽은 가지이니 만큼 그들의 고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퍽 매력적이었다. 그네의 몸뚱어리는 감람녹빛을 가진, 버려진 나무 벤치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습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중고품이어서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의자의 왼쪽 귀퉁이에는 퍼런 이끼가 계곡의 매끈한 돌덩어리처럼 무성했으며 나무는 물러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읍내 늙은 목수의 호의로 목공소에서 낡은 벤치를 건조시킬 수 있었다. 일주일가량 뒤 연락이 왔다.

  ─나무 잘 말라 뒀으니께 와갖고 가지 가리.

  틀니를 낀 노인의 발음은 치처럼 어눌했으나 이는 편견임을 안다. 그들은-마을 사람들은- 절제를 아는 나무 같았다. 굽바자와 돌담에 동화된 그들은 눈가의 주름마저 나이테처럼 자연스럽다. 나는 그들에게 아련함에 근이 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숲은 밤이 되면 어두워졌고 낮이 되면 빛이 들어 밝아졌다. 네온이 휘황한 도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지 않은가. 최 선배는 집을 준공하며 나의 새 터전이 부럽다는 제 의견을 설핏 내비쳤다. 나는 그러나 도시에서 나고 도시에서 자란, 뼛속까지 도시인의 회백질 풍습에 절어 있는 사내였다. 최 선배가 보금자리에 대해 행동이 아닌, 의견만을 표명하는 데에 그쳤던 것은 그가 도시에 둥지를 튼 새였기 때문이고 그의 DNA에 각인된 '향도 염색체' 때문이었다. (물론 향도 염색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도시인들의 도시의, 도시를 위한, 도시에 의한 그 본능들은 그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와 같은 족속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도시가 좋았다. 내가 그곳을 떠나온 이유라곤 자아실현을 위한 동면의 욕구가 정착의 본능을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굳이 이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는 물들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내 직업의 전통성과 고적함을 고려해본다면 누군가는 의아하다는 기색을 내비칠 것이다. 나는 그러나 그네들에게 묻고 싶다. 천연염색가는 그네들의 머릿속에 든 그 우아함을 지녀야만 하는가. 양복 대신 한복을 입고 아파트 대신 한옥에 살며 하루종일 쪽물과 포들을 마주해야 하는가 나는 그네들에게 묻고 싶다. 나는 자연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나 자신이 자연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분리되고 동떨어진 또 하나의 개체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더욱 악착같이 우짖는다. 나는 너희들의 일부다. 귀머거리 노송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그리도 매섭게 나를 내치곤 했다. 나는 이제껏 그들의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이사를 오고서 한 달 즈음이 지났을까. 나는 자연 대신 이 고즈넉하고 다채로운 시골 마을에 적응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을 노인들은 가끔 낡은 삼베 잠옷을 들고 내 작업실을 찾곤 했다. 그들의 눈에 나는 하루종일 작업에 몰두하는 인색한, 그러나 마음씨 좋은 마을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이기 물을 들일 수 있는 기가?"

 

  그들은 이염수를 담을 수 있는 대나무통과 그 덮개에 달린 대를 한두 번씩은 들추며 내게 그리 물었다.

 

  "네, 그럼요. 오늘은 무얼 가져오셨어요?"

 

  그 말에 그녀가 자줏빛 보를 펼쳐 보인다. 땀과 때에 절어 목덜미와 겨드랑이 께가 누렇게 변한 잠옷. 인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그 역사들을 마주할 적마다 나는 흥분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발기했다.

  딸아가 선물로 준 긴데 한 5년은 됐다 안 카나.

  그렇게 말하는 하얀 머리의 노파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켜켜이 접힌 주름 덕에 그녀의 눈은 마주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코에 갖다 댔다.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제법 시큼한 냄새가 난다. 노파에게 일주일 뒤 다시 오시면 된다는 말을 건네고 잠옷을 개어 상자에 가지런히 담아 두었다.
  염색은 대개 한꺼번에 하는 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꼭 일요일 오후 정해진 시간대에만 말이다. 때문에 같은 주에 그들이 내게 맡긴 옷들은 대체로 같은 색에 다른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옷에 전사지를 이용해 노부부의 얼굴을 프린트해주기도 했는데 이 또한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그들의 작은 행복에 울고 또 웃었다. 작은 커뮤니티-네트워크-에선 모든 것의 전이가 빠르다. 갑의 송아지가 을네 개한테 물려 죽었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는 데엔 30분이 채 걸리지 않고 병네 집에 쌀 몇 되가 남았다더라, 하는 소문들도 더러 있었다.

 

 

 

  요샌 젊은 삼사십 대들의 귀농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그들을 향한 마을 주민들의 관심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귀농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트랙터를 몰 줄 안다. 얼결에 들린 마을 이장이 손수 내게 일러준 것이었다. 그것은 과한 호의였다. 그들은 절제를 알지만, 중용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이웃 삼 척은 꼭 지키면서도 이가 중용임을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사랑스러웠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정감과 세월로부터 흘러온 지혜 따위의 것들엔 마성이 깃들어 있다고 난 믿는다.

  도시의 시멘트 빛과 인공적이고 자극적인 색채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나의 작품에 열광했다. 그것은 무지에서 기인하는 정감이 아닌 광란과 흡사했다. 나는 내가 인터뷰 되고 내 작품이 실린 매체들을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다. 아니다. 딱 한 번 있었던 것도 같다. 맨 처음 인터뷰를 진행했던,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꽤 인지도가 높았던 패션 잡지였다.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는 '30살 청년, 전통을 물들이다.' 혹은 그와 비슷한 문구였다. 물리지만 2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성들을 자극하기엔 딱 적절한 문구였다. '30살 청년'이 말이다.
  나는 패션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 잡지를 정기 구독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내 인터뷰가 실렸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의미에서 그것을 내가 기거하던 아파트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무려 4바닥(2장)을 차지하는 그 인터뷰의 4분의 1조차 채 읽지 못한 채 잡지를 덮어 바닥에 내던졌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저런 말을 지껄였단 말인가. 그것은 일종의 경멸과도 같았다. 천연염색이란 그러나 시쳇말로 '돈이 되지 않는' 직업이었고 당시 생곌 유지할 길이라곤 내게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분한 현실이지 않은가. 그러나 본래는 다 그런 것이라며 몇 년 전 서거하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할 필요도 분할 필요도 없다 등을 두드리는 그의 주름진 손은 차가웠다.

  ─그래서 어찌 되고 싶나, 자네는?

  몇 십 세나 어린 제게 한사코 높임말을 쓰시던 분이셨다. 원래 전통을 지키는 일은 고독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전통을 지키자, 라는 그 말 한마디는 기실 예로부터 세뇌되어 깊숙이 박혀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몸이 아닌 머리로만 깨우친 그런 유의 것들 말이다. 저조차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위선에 절어 있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와 스승님이 행한 것은 단순한 물리적 염색 행위가 아닌, 색을 되살리고 정신과 의미를 부여하는 신성한 종교 심성적 예술이었다. 그저 천쪼가리에 아름다운 색을 입히고 그것이 오래토록 보존되어 그네들의 찬사와 찬미를 받을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한창 더울 오후 3시를, 시침이 막 지나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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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1. 15:56

프로그램 "아발론"

1

  헤일의 눈꺼풀이 기나긴 정적 끝에 파르르하고 떨려왔다. 이빨에 너덜너덜하게 찢겨 보랏빛이 도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자 아릿한 통증이 도는지 헤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만난 이래 가장 인간적인 반응이었으나 감흥은 이에 그치고 말았다. 멍이 든 것 같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중얼거려 보지만 헤일은 어줍잖은 거짓말에 속아주지 않을 터였다.

 

  "……너와 이런 짓을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어."

 

  그의 조막만한 머릿속에 든 쓰잘데기 없는 죄책감을 알고 있다. 나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만 둬야 해, 벨. 헤일의 손은 어느새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이내 매끄러운 몸짓으로 내 손을 제 입술에서 떼어냈다. 어깨가 무거웠다. 부드럽지만 매몰찬 거절의 몸짓에 가슴 한 켠이 아렸다. 헤일이 이상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내가 수줍은 숫처녀처럼 그가 뿌리친 내 손을 다른 손으로 감아 쥐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하, 하고 허탈한 웃음이 입술 새로 튀어 나왔다.

 

 

2

  주먹을 쥐자 손 안에서 타들어 가던 편지지는 바스라져 바람결에 흩어졌다. 벨은 제 손바닥에 각인처럼 남은 검은 그을음을 응시하다 헤일을 올려다 보았다. 목덜미를 덮은 헤일의 검은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리며 제 시선에 반응하는 것만 같다. 벨은 눈을 끔벅였다. 무슨 일이야? 헤일이 걱정스럽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어온다. 오른쪽 눈을 가린 벨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 손길은 퍽 상냥하다. 벨은 연매 묻은 손을 털어냈다. 미미한 가루들이 방 안 적막한 공기 중을 떠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헤일이 벨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리고 답했다.

 

  "아무 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야."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헤일은 자신을 노려보는 보는 벨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셰이드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벨? 꼭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제 아내를 추궁하는 듯한 어조다. 헤일은 언제나 상냥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상냥함과 벨의 무언가를 맞바꾸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비치지 못했다. 셰이드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벨. 양모 카펫처럼 보드라운 목소리로 헤일이 재차 추궁해 왔다.

 

  "그만해, 셰이드!"

 

  벨은 헤일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질렀다. 돌아오는 헤일의 반응은 그러나 없었다. 헤일은 뿌리쳐진 제 손을 무연히 내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셰이드.

 

  "셰이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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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1. 13:54

아바타



  뒤늦은 아바타 덕질 :(

Posted by 토박

2013. 12. 11. 13:31 떠듦

131210

  더이상 예쁜 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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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1. 11:52

[맥윌]

  "하지만 아저씨는 분명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디의 말에 윌슨 퍼시발 힉스버리는 손에 들고 있던 각설탕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알토 플룻과도 같은 목소리를 가진, 자신을 응시하는 소녀의 동공은 허하게 비어 있었다. 아비게일이 사라졌어. 그때 우리가 본 것은 환상이었을까? 그녀는 한동안 처량한 목소리로 윌슨의 옷자락을 그러쥔 채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녔었다. 윌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두 인형을 만들기 위해 잘라냈던 수염은 다시 자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웬디도 그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성장하지 않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그곳에 떨어졌던-분명한 타의였지만- 것은 결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수염이 자라지 않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윌슨은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끝없이 검은 입사귀가 나리는 언덕배기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비어버린 웬디, 불타 죽은 윌로우, 어둠 속에서 사라진 위커바텀 부인, 죽지 못하는 웨스(와 벌루노맨시), 그리고…… 그리고 그는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웬디만이 이따금 그를 찾아올 따름이었다. 윌슨은 기다림을 알았다. 웬디를 그런 그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윌슨은 손에서 연장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 그곳에 있니? 내 심장을 쪼아 먹는 저 까마귀 떼의 부리들을 치워내! 이 구멍은 내가 들어가기엔 너무 작은 것 같아. 저 돼지를 죽여! 그리고 피를 뿌려! 웬디는 꿈속에서 계속해 소리쳤고 맨 처음 윌슨은 그녀를 악몽으로부터 건져내다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는 웬디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웬디의 입을 막고 자신의 귀를 막는 대신 그녀의 삐죽이 튀어 나온 결이 좋지 않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면 그녀는 이내 고롱이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었다. 맨 처음 맥스웰을 만났던 때를 떠올린다. 자신은 연구 중에 있었다. 터져나간 스포이드와 유리마저 녹이는 용액들이 즐비한 작업실의 공기는 혼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의 꾀임에 넘어갔다. 애초에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가정하는 것은 이제와 무의미한 짓이 되어버렸으나 미련은 끊임이 없었다. 소녀들과 소년들의 목을 베고 피를 쥐어짜내는 것을 맥스웰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목빛을 띠는 바닥은 기실은 코팅되지 않은 나무 바닥에 스미운 핏자욱이 만들어낸 빛깔이었다.

  조금 곤란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자신의 작업실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낡은 라디오는 나긋한 그의 음성을 실어 날랐다. 전파 따위가 줄 수 있는 감촉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은 웬디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이 그곳에 있었다. 맥스웰을 자신들의 세계로 이끈 것은 다름아닌 윌슨 자신이라고. 이것은 그네들이 살아 숨쉬는 한 끝까지 지켜나가야만 하는 비밀이었다.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용서해 줄 이는 그 누구 하나 없었다. 금지된 주술을 알려주도록 하죠. 윌슨은 손을 뻗었다. 금단의 사과는 색이 붉었고 달큰하기까지 했다. 지식에 굶주리고 기갈 들린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사과를 얻기 위해 긍종하고 따르는 것 뿐으로, 그는 후에서야 자신이 그의 명령으로 만들어낸, 자행한 금지된 주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맥스웰의 문Maxwell's Door. 맥스웰을 자신의 사냥터로 부르는, 앨리스의 토끼굴. 그곳은 자신이 들어가기엔 웬디의 말처럼 너무도 작았다. 윌슨은 그 문이 자신의 세계과 그의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임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으로 홀린 듯 레버를 잡아 당겼던 때, 실제로 그가 보았던 것은 소름끼치는 맥스웰의 미소였고 광소였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윌슨은 어느새 티 테이블 위에 얼굴을 처박고 잠은 웬디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어째서였을까. 그 악마의 농간에 어째서 우리들은 놀아난 것일까.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후 조사해본 바로는 맥스웰은 맥스웰이 아니었다. 그는 무대 연기자인 평범한 사내였다. 그 사실이 더욱 두려이 다가왔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영국인, 평범한 연기자. 그런 그가 결핍된 이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살아 남기를 강요했다. 지독한 그들의 적대자antagonist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우는 것만 같아 머리를 쥐어 뜯자 사특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익숙하다. 환청은 현실감이 있었다.


  "당신, 별로 좋아보이질 않는 군요."

  "그만 둬. 이젠 지긋지긋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인정해야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악마 새끼!"


  기어코 욕설을 토해낸 윌슨은 꿈질대는 웬디를 바라보곤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등 뒤를 돌아봐선 안 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무언가 다른 듯도 싶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이 뺨을 간지럽힌다. 소름 끼치는 체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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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1. 11:49

침묵의 요람

  이름은 쥬드 앤더슨. 남자아이이고 고아다. 지능은 대강 161 정도가 아닐까. 사실 연표를 정리해둔 게 어딘가에 있을텐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있지를 않아서 정확하게 정리를 하기는 조금 어렵다. 쥬드는 4살 때부터 기억이 있다. 그 전은 어찌 생각해 보면 없는 것이 당연하고…… 여하튼 쥬드가 어느 정도 철이 들었던 때엔 이미 보육원에 있었다. 블라셰 제8지구에는 보육원이 5개 있었는데 한 지구는 보통 25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서 대강 다섯 구역 당 하나 꼴로 고아원이 있었던 셈이다. 그 중 제5보육원이 쥬드가 크고 자란 보육원. 각각의 보육원은 하나의 AI 오퍼레이터가 관리하는데 아이들을 다루는 곳이 되어 놓으니 오퍼레이터들은 모두 안드로이드 수트에 동기화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제5보육원의 오퍼레이터 시스템명은 Vlu-017이고 기기명은 미세스 블루도우(Mrs. Bludow). 다섯 개의 보육원의 다섯 개의 AI 오퍼레이터 중 (그나마)제일 최신 모델이며 모성애에 특화되어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 제5구역에서 제10구역은 블라셰에서 기실 슬럼가 취급을 받는 곳(Blurredtown; 블러드타운)이었다.

* 블라셰에서는 키드내퍼들이 집단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활동하는데 그들은 일반 가정의 자녀들을 납치하기도 하나 주로 블러드타운의, 새간의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아들을 주로 납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아이를 납치한 후 사라지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 보육원에 버려지는 아이들은 사지가 멀쩡하지 못해 부모에게서 버림 받은 경우가 많다. 물론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아이를 버리거나 아이가 가출을 해 보육원으로 직접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보육원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소속된 아이들을 양육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이는 교육을 포함한다(만17세까지).

* 인공배양되었으나 실패작으로 분류되는 아이들 또한 보육원에 버려진다.

* 미세스 블루도우는 파란 머리카락에 파란 옷,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쥬드는 제5보육원에서 퍽 얌전한 아이로 자랐다. 그런 그와 그나마 가장 친했던 아이는 한 살 위의 블리스 앤더슨. 참고로 쥬드와 블리스의 성이 앤더슨인 건 아니다. 앤더슨은 보육원 식별 코드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앤더슨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여하튼 어느날 블리스는 돌연 실종되고 미세스 블루도우는 밤을 새어 가며 그를 찾는다. 맨 마지막 블리스를 목격한 사람은 쥬드였다. 쥬드는 그러나 사람들이 어째서 블리스가 닙치되었다 이야기하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블리스는 사실 키드내퍼을 자의적으로 따라간 것이었기 때문.

  미세스 블루도우는 무척이나 슬퍼하며 보육원의 아이들을 더욱 보호하려든다. 하지만 어느날 블리스가 보육원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녀는 무척이나 기뻐하는데, 블리스는 일주일 가량이 지난 뒤 쥬드에게 무언가를 떠보듯 묻는다. 이곳을 떠날래? 라고. 쥬드는 고개를 젓고 블리스는 그 다음날 다시 사라진다. 미세스 블루도우가 다시금 상심에 빠진 것은 또 말할 필요가 없다.


  서기 2980년, 인류는 급속한 과학 기술 발전을 기반으로 안드로메다(Andromeda) 은하의 하문(Hah-moon), 브라이타인(Breitein) 은하의 블라셰(Vlache)에 이어 인류가 거주 가능한 4번째 행성, 지크하르콘(Zik-harcon) 은하의 B-047을 발견하게 된다. B-047은 전체 행성 면적의 약 1/6이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성 자체의 크기는 제1행성 지구의 약 3배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제3행성 블라셰의 최고 통치 기관 에르모니시아(Hermonitia)는 B-047의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고 약 300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B-047에서 불과 보름 떨어진 B-047의 소위성 RN-771로 이송된다. 그들의 임무는 행성의 개발 및 연구, 조사에 앞서 그 무엇보다도 '생존'이었다.


  쉽(Spaceship)이 RN-771으로 향하는 15년의 기간 동안 사망자는 300명 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약 120명에 달하였으며 대부분은 정신적 문제로 인해 서로 간 척살을 자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번식하였으며 약 180명으로 줄어들었던 쉽 내의 인구는 RN-771에 달하였을 땐 250명 가량으로 늘어 있었다고 한다.


  B-047은 동 에르하(Ehrhaa)와 서 에르하, 이 두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극관에는 얼음이 얼어 있으나 이는 이산화탄소로 확인되어 사실상 B-047에 마땅한 수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¹으로 판명되었다. 불구하고 무리한 인구의 이동을 감행한 에르모니시아는 이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지하수가 존재한다."라고 말이다.


¹ 바닷물이 있으나 그 염분 농도는 약 170‰에 달한다. 이 바닷물을 증류할 시설이 아직 설비되지 않은 것 또한 이유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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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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