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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3.12.12 2013년 글러 연말 정산
  10. 2013.12.11 [캐롤라인] 통증

2013. 12. 12. 15:12

Q

  뽀도독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 들어 있던 알약 열 알이 바스라졌다. 뜨겁게 녹인 플라스틱과 흡사한 향과 맛이 났다. Q는 계속해 입을 고물댔다. 마침내 입 안 그득 알약들이 모두 바스라졌던 때, 그녀는 노오란 가루들을 밀어내려는 목구멍을 저주하며 물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기를 잊은 식도에 컥컥대며 목을 움켜 쥐고는 한참을 기침한다. 반사적으로 눌린 누선은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Q는 바닥에 유리컵을 내던지고는 주저 앉았다. 누런 위액이 코 밑으로 흘러내렸다. 쓰라리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대다 Q는 제 목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처음엔 검지, 그 다음엔 중지, 그 다음엔 네 손가락. 구역질 나는 제 몸을 녹여 담그고 싶었다. 꿀렁이며 뱃속을 휘젓는 핏물을 모두다 뽑아내 들이마신다면 조금은 나아질까. 희미하게 경련하는 손을 잘라내고 싶었다.

 

  언제부터였는가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잠들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다만 희미하게 떠올릴 뿐이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 깨어나길 반복해 온 그녀에게는 잠들 수 없다는 꿈이 악몽이었다. Q는 제 음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붉은 빛이 도는 피가 손가락 끝에 묻어 나온다. 하혈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시커멓게 산화된 피가 잠옷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애기집 따위는 그녀에게 불필요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테니까. 붉게 부어오른 눈가가 따갑다. Q는 자신의 손등을 세게 물어 뜯었다. 살점은 튿어져 나오지 않는다. 짐승이 물어 뜯은 것만 같은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Q는 눈을 감고 다리 사이 엉겨 붙은 핏덩어리를 잡아 당겼다. 물컹하다. 끈적하게 손에 묻어나지만 미끌미끌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감촉이었다. Q는 바닥에 누워 허우적댔다. 손 끝에서 잡아챈 것은 정제된 아티반 통이다. Q는 기계적으로 통을 열어 입구를 입에 머금었다. 누런 알약은 계속해 입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끊임 없이, 그녀의 의식이 멀어지기 전까지. 입을 벌리면 혀가 노란 색으로 변해 있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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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5:09

Q

  포크의 끝에 짓눌린 방울 토마토가 압력을 이기지 못한 채 퍽하는 소릴 내며 터져 오른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가 긁혀 나갔다. 그 소리에 J는 고갤 든다. Q는 고갤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얇은 금테 안경을 코끝에 걸친 J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이었다. 구역질을 불러 일으키는 검은 눈. 서늘한 그 눈매는 그러나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았다. Q는 가빠져 오는 제 숨결을 느끼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어째서? 머뭇거리지 않고 씹어 내뱉었다.

 

  "……시끄러워."

 

  그가 어째서 이 방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마산댁은 그가 바쁜 사람이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는 평소 상당히 바빠 보였다. Q는 그가 평생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다. J는 이에 답하듯, 일말의 흥미조차 내비치지 않겠다는 듯, Q를 향하던 시선을 다시 손에 들린 책으로 내리깐다. 아니,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포악한 Q의 손에 들린 단죄의 칼날은 마악 토마토 한 마리를 더 죽인 참이다. 그녀는 쿵쿵대며 식탁보 덮인 유리를 내려 찍어댔다. J는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는 계속해 책을 읽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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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5:04

로즈마리가 피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핸드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잠시간은 억울한 마음에 섪어 눈물이 차올랐지만 이내 어디서부터 기원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났다. 6시간이 지났다. 그에게선 연락 한 통조차 오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는 퍽 처량맞은 자세였고 내 기분 또한 그에 걸맞게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고갤 들어 하얀 천장을 응시하다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걸어가 커피를 내렸다.

  ─네가 내 인생을 망친 건데,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여상한 표정으로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그에게 헤어지겠다고 말했었다. 늘 친근하게 목 께를 애무해왔던 손은 그러자 거칠게 내 멱살을 틀어쥐었고 나는 숨이 막혀 쿨럭였다. 그는 미쳤어! 내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고 나는 제법 센 힘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며 그 반동으로 머리를 바닥에 찧었지만 아픈 것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거칠게 나를 일으켜 세웠고 뺨을 후려갈긴 후 급하게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도망자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나는 소파 위에 걸쳐진 그의 양복 재킷을 바라보았다. 저거, 안 가져다 줘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나는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나. 그의 말에 웃으며 고맙다고, 사랑한다 속삭였어야 했나?

  차가운 바닥에 그렇게 남져진 채 몇 분이고 운위했지만 결국 답을 도출해내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아냈다. 화가 났고 슬펐으며, 또 황당했다. 그에게 얻어 맞은 뺨이 아직도 화끈했다. 손자국이 났을까.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5분 동안 내린 커피를 5초만에 다 마셔버렸다. 그는 내게, 이혼을, 했다고, 했다. 이혼. 이혼이라.

  나는 하얀 도기 커피잔을 부엌 바닥에 내던졌다. 코팅된 대리석과 마찰한 포트 메리온의 커피잔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졌다. 저 위를 걷고 싶다. 앙금처럼 쌓인 감정의 노폐물이 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도기 조각을 치우고 젖은 걸레로 바닥을 닦아냈다. 카페인의 효과는 제법 빨리 나타났다. 심장이 쿵쾅댔고 대뇌가 한껏 고양되었다. 여전히 그에게선 연락이 없다.

  나는 그의 자극적인 말에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책임전가에 화가 난 것 또한 아니었다. 그의 손찌검 또한 내 도덕심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폭력에는 당위성이 숨어 있었다. 내게는 그것은 거부할 핑곗거리가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마지노 선을 넘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는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고 금쪽같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으며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아파트와 은색의 매끈한 벤츠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판단력은 덧없이 뭉게져 바닥에 내버려진 것이다. 이혼. 이혼이라. 나는 다시 한 번 더 뇌까린다. 수 십 번 중얼거린 이혼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내 입속에서 이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미안해, 나 사실은 게이였어? 우리 이혼하자? 아니면,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지러운 마블링marbling에 정신이 혼미했다. 카페인 때문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 드러누워 무소음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다. 퇴근을 한 후 그를 만났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와의 저녁 약속이 이렇게 취소되었고 나는 이제 커피를 한 잔 한 후 침대에 누워 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정장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옷을 갈아 입는 것조차 귀찮다. 나는 손을 뻗어 침대를 더음어 핸드폰을 쥐어 폴더를 열었다. 부재중 통화 한 건. 그가 사과를 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기대감에 차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그러나 모르는 번호였다. 뒷번호가 낯이 익었지만 누구의 번호인지 전연 알 길이 없었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 번호-부재중 전화의-였다.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혹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일까 싶어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그러나 답이 없다. 침묵 가운데 깔깔거리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회사는 아니다. 누구지. 나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다시 한 번 더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지만 낯이 익은 번호였다.

 

  "누구세요?"
   「……나야.」

 

  눈초리가 가라앉았다. '그'였다. 이 번호는 또 뭐야? 내가 물었고 그가 허탈하고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밭고 마른, 침잠된 웃음이었다.

 

  「아내 핸드폰을 잠시 빌렸어.」

 

  아내의 핸드폰? 나는 발신 번호를 재차 확인했다. 아.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낯이 익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0357. 그의 아내의 핸드폰 번호와 그의 핸드폰 번호는 맨 마지막 뒷자리가 똑같았다. 아빠, 누구야? 천진한 계집아의 목소리가 대뜸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답한다: 「가은이가 모르는 사람이야. 조금있다가 놀자, 가은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더니 나직이 말했다. 갑자기 조용해 진 것을 보니 장소를 바꾼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아까 전엔 미안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폭력은 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미안하다.」
  "폭언은 괜찮고?"

 

  내 말에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은 목소리로 그가 답한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마. 나 맞아도 싼 거 맞아. 당신이 날 패도 나는 할 말 없어."
  「미안하다.」

 

  나는 그가 연신 중얼거리는-고장난 축음기처럼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왔다. 찬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쿵쾅대던 심장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 심박수를 가라앉혀 갔다. 나는 하얀 베란다에 어울리지 않는 파란색 테이블과 의자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의 위에는 갈빛의 작은 화분 하나와 말보로가 얹혀져 있었다. 말보로는 흡연자인 그를 위해 이따금 한 갑씩 사놓았던 것이었다. 나는 흡연자가 아니었지만 갑자기 담배를 입에 물어 보고 싶은 충동에 휩쌓였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아직도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장황하고 길게 풀어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미안한지, 어째서 화가 났었는지에 대해. 그는 그러나 나와 이에 대한 합리화와 타협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성정이었다. 그는 핑곗거리를 댈 망정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때문에 집사람 핸드폰을 잠시 빌렸다.」
  "……아, 잠깐만. 뭐라고 했어?"

 

  중요한 얘기를 놓친 것 같아 그의 말을 흘려 듣다 되물었다. 그는 체념이 담긴 어조로 내 말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네가 날 수신 거부자 목록에 등록해 놓았잖아.」

 

  나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언제 이래놓은 거지. 스팸 번호 목록에 그의 번호가 들어있다. 스팸 메일함에는 그의 문자가 10통 가량 들어차 있었다. 대체로 전화 좀 받아줘, 내지는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고로, 그는 문자를 보내고 전화도 걸었지만 내가 그의 핸드폰 번호를 스팸 번호로 지정해놓곤 그걸 잊어 버리는 바람에 문자도 전화도 받지 못했다는 소리다. 진짜네. 미안해. 잊고 있었어. 내가 말했고, 뭐? 하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정말로, 잊고 있었어."
  「세상에.」

 

  그의 허황한 목소릴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쥐고선 만지작거리던 말보로를 내려놓고 문득 화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릇푸릇한 잎사귀의 로즈마리다. 그와 나의 교제를 기념해 우리가 하루 되던 날 구입했던 로즈마리. 여러 갈래로 돋아난 첨탐 같은 줄기의 그 끄트머리엔 붉은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양육권은 어떻게 되었어?"
  「……아내가.」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그래? 그렇게 무의미한 되물음을 입 밖으로 내며 나는 로즈마리의 잎사귀 하나를 꺾어 코에 갖다댔다. 진하고 은은한 향기가 비강을 한 번 돌고는 사라진다.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기실 결혼이라는 그 관계의 추상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결혼이라는 건 말이다. 진정 그네를 사랑한다면 나는 하룻밤의 꿈을 꾸리라. 그리고 이 촉수에 엉겨 우리가 공멸하기 전에 그네를 놓아 주리라.

 

  「─야, 나는……」
   "응?'

 

  나는 전화선을 타고 흘러간 내 목소리가 어떻게 변조되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갑작스레 그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는 날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공멸을 원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당위성에 뜻을 부여하는 것을 잊은 채, 그는 그저 사고 않는 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과연 현명하다. 그것은 그러나 내겐 아무런 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네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의 말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지구를 떠나 어딘가의 운하로 도망을 치고 싶었다.

 

 

 

  그의 도덕성은 갉아내고 긁어내면 다인 표피층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런 이가 아니었다. 그는 신사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정한 틀 속의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기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스스로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도 위태롭지 않은가. 사내는 늘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고, 그로선 이혼이라는 결정이 아마 마지노 선에 다다른 선택지였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버린 것들을 강조하며 내게서 사랑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려 할 지도 모른다.

  베란다의 바람이 선선했다. 유리 미닫이 문 너머로 바라본 거실의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테이블 위의 말보로를 집어 들었다. 마치 적장의 목을 베는 기사인 체 긴장해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곤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베란다 밖으로 떨어뜨렸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밤이 깊어 손바닥만한 말보로 담배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마치 시체를 유기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기이한 일이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진공청소기의 소음이 멎을 때까지 그의 집 현관 앞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저 막연히 떠올렸다. 이 아파트 이렇게 방음이 안 되었던가, 하고.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그의 집에서 뒹군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윙하는 청소기의 소리가 멎고 5분 정도가 흘렀음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잠깐만, 열어줄게, 하고 그는 제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인터폰이 간헐적으로 치직거렸다. 나는 그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구두를 벗어 현관에 정돈해두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혹은 맨 처음- 들렀던 때 신발장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그의 딸의 분홍색 리본이 달린 구두가 사라져 있었다.

  아, 정말로 이혼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류에 서명을 했다 내게 알려준 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그는 벌써부터 별거하고 있었다. 나는 콘솔 위에 그가 엎어둔 것으로 보이는 액자를 들추었다.

 

  "딸이랑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봤었는데,"

 

  액자 속에선 단 한 번도 마주한 기억이 없는 여자와 앞니가 빠진 계집아가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액자를 덮어두었다. 굳이 묻지 않았음에도 그는 입을 열었다.

 

  "없더라고."

 

  사진기는 늘 내가 만졌으니까 라고 흘러가는 말로 뇌까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그가 늘 가족의 액자 속에서 제 3자였다면…… 나는 어쩌면 그를 동정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불길한 상상을 애써 고갤 저어 떨쳐냈다. 어디 불편해 라고 묻는 목소리는 나긋하고 상냥해서 안타까웠다. 나는 이제 그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이건 고질적인 병이었다. 나는 늘 사내의 품에서 늘 철새일 수 밖에 없었다. 매번 지긋하리만치 떠올린다. 이번엔 정착할테다 라고 오기로운 목소리로 다짐할 적마다 그것을 비웃는 속내는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적 충만감이나 육체적 관계에 따르는 만족감은 나의 본능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상냥했고 (밤일은)성실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러나 이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안타깝다. 그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선배는 일이 커지면 도망가 버리잖아요.

 

  이제껏 기억 속에 남아있는, 10년 전 사귀었던 첫 연인이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의 첫 연인은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 친구였다. 그녀는 얼마나 다정多程하고 상냥했던가. 나는 연애에 있어선 퍽 쑥맥이었으니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는 학과 동기들과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와 약 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었다. 맨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은 그러나 상냥한 이별의 문장을 빙자한, 날카로운 날의 힐난이었다. 도망. 그 단어는 아마 나의 본능-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리라.

 

  "사진 찍을래?"

 

  그의 손에는 플라로이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정녕 나를 저 조막만한 필름 속에 박제하고픈 것일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안 찍어도 괜찮아."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를 더욱 세게 끌어 안으며 속삭였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온기를 남겨 주고팠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릴 그에게, 짧고 얇은 레퀴엠을.

 

  "……하기사 언제든지 찍을 수 있으니까."

 

  나는 차마 그에게 부정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 흔하디 흔한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시큼한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새벽은 차가웠고 어둠은 날카로웠다. 나는 소리 없이 그의 품을 빠져나와 옷을 챙겨 입고 구두를 꿰어 신었다. 현관문의 문고리는 묵직한 감촉을 남기며 손을 떠나갔다. 그의 아파트 엘레베이터의 구석에 몸을 기대고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그의 집 비밀번호를 잊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적어도 그 첫자리라도 잊기 위해 몇 번이고 엉뚱한 숫자를 중얼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무의식 중 바라본 베란다의 탁자 위에 말보로는 더 이상 자리하고 있지 않다.

  로즈마리의 붉은 꽃망울은 이미 개화해 있었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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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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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4:45

2013년 1월 5일

"처음이었어."

그의 취향대로 쓰기만 쓴 커피를 들이키는 내 속은 새까맸다. 허리 께까지 기른 금발을 묶을 생각도 않고 그는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통증은 없었고, 나는 때문에 더 배가 아려왔다. 하이얀 도기 위에 산을 이룬 각설탕을 한 움큼 쥐어 커피잔에 털어 넣었다. 창 밖은 유채색만이 찬연하다. 건너편 동의 유리창들에 비친 하늘이 구역질 나올 정도로 푸르렀다.

"그랬어?"

그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마치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그랬어. 나는 턱을 괴고 설거지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곡조를 흥얼댔다. 그 흥얼거림은 높아졌다 낮아졌고, 빨라졌다 느려졌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이 떠올랐다. 그는 맨 처음 나를 잡아챘던 때에도 저 노랠 흥얼거리고 있었다. 달그락대는 식기가 고무 장갑 새에서 요란했다. 몸속을 맴돌던 성욕이 분출구를 찾지 못한 채 머리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있잖아," 나는 푸스스하고 짚단 무너지는 듯한 소릴 내며 웃었다. 아누스를 가르며 들어오던 묵직한 그 감촉이 되살아나는 듯도 했다. 약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세제를 수세미 위에 짜내며 나를 뒤돌아 보았다.

"왜 그러지?"

나는 할 수 있는 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그런데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내지는, 우리가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뒹굴던 것은 과연 언제였는지에 관해. 나의 기억은 내가 당신의 위에 올라타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멍청한 꼴이었지만 당신도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홍빛 램프에 당신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나는 분명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만났었지?"

나의 멍청한 질문에 수세미를 문질러 거품을 내던 당신의 손은 멈추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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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0) 2013.12.10
Posted by 토박

 

  아름답지만 두려운 것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현존할 것만 같던 내 사랑, 나의 전부, 나의 생명.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숭배하듯 나는 너를 숭배하고 또 사랑했다. 감히 닿지 못할 곳에 자리하고 있던 존귀함이 얼마나 찬연하게 빛났던가. 그를 추억할 방도가 없어 슬퍼했지만, 나는 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대가 내게 남긴 것을, 그대가 내게 토해낸 것을. 와중 사랑을 속삭이고 무정하게 떠나버린 그대- 따위의 철 지난 유행가의 가사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깔깔대며 웃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허히 들려와 고개를 들면 오래된 백열 전구의 필라멘트만이 붉게 물들어 있을 뿐이다. 이미 늦어버린 홍조를 얼굴 그득 띄우며 나는 재차 차가운 손바닥으로 뺨을 식혔다. 소태를 머금은 듯 쓰고 얼음을 뼈째로 삼킨듯 시린 밤이다. 어기적 매트 깔린 협착한 방바닥을 기어 장판의 전원을 켜고 줄을 잡아당겨 백열등을 소멸시켰다.

  내가 둥지를 튼 자취방은 두 명이 몸을 부대끼며 살기엔 너무도 좁았다. 몸을 옹송그려 이불을 덮고 우리 둘은 늘 꿈지럭댔다. 이따금 방충망을 넘어넘어 작은 전구에 달려드는 나방떼가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머리맡에 둔 전공서적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저걸 머리에 넣어 다니면 참 편할텐데' 뿐이었다. 그대가 결혼을 생각치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지나버려 입을 열기도 우습지만, 싸구려 커플링과 시든 장미 꽃다발을 주워 일반 쓰레기에 버린 것은 바로 나였다. 그대가 우리를 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둘 중 그 누구도 수직 관계를 원치 아니했었던 것이다. 어째서일까. 무거운 추가 되어 함께 죽기 위해 발버둥쳤던 나는 부표에 쓸려 이내 심연으로 가라앉아야만 했다.

  그대가 돌아올 자리는 언제나 내 곁에 있지만 그대가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이 못내 종국엔 아쉬움 담긴 울음이 터졌다. 흐느낌이 선율처럼 자리 잡아가는 이 겨울 밤이 고이 갈려 바닥에 깔리기를 소망하는 스스로의 나겁함을 알고 있는가. 비강을 휘젓는 역한 향취에 장판 위를 구르던 몸을 일으켜 힘겹게 변기로 다가가 모든 것을 게워냈다. 한 번 터진 누선은 막히지 않은 채 계속해 눈물을 쏟아낸다. 뽀독뽀독 입술을 짓씹는 이빨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아이가 생겼어.

  해사히 웃음보를 터뜨린 나는 멍청했는가. 그에게선 이따금 독한 장미향이 났다. 손으로 비벼 빨던 그의 하얀 티셔츠에 묻어 있던 립스틱 자욱도 나는 잊지 않았다. 우습지 않나.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내 몸뚱어리조차 아쉬워 하지 않은 채 좁은 문을 건너 나를 버리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에게는 집이 있었다. 내가 지내는 이 슬픈 단칸방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된 집이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아기와 햇살 같은 계집년이 산다고 했다. 그것이 무채색 짙은 현실이라고도 그는 말했다.

  있잖아, 있잖아…… 나는 잠든 당신의 옆 얼굴에 속살였다. 아이가 생겼어. 아이 말이야.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누린내 나는 수건에 닦아내고 다시 방 한가운데에 깔린 장판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눅눅한 이불이 차가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좁은 방 안, 위잉하고 노트북의 팬이 공회전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질척하게 무언가가 장판 위로 퍼져나가 잠옷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고 잠든 그대를 바라본다. 지지직하고 환한 빛을 발하는 전구 내부에서 스파크가 튄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면 우린 곧잘 닭살스러운 연인 놀일 하곤 했는데. 허벅지 위에 무릎을 뉘이고 귀이개로 귀를 파준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애교스러운 말씨를 섞어 떠들고 광대처럼 웃으며.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있잖아, 있잖아. 잠이 안 와?

  내려 앉은 그대의 눈두덩이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렇게나 달아나기 위해 애를 쓰던 검고 깊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고통에 배를 감싸쥐었다. 아가, 쉬잇, 착하지, 쉬잇. 뱌뱌대는 아기의 옹알이가 기분 좋은 산들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그의 다물린 입술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기처럼 옹알옹알댈 것 같은 작은 입술이다. 사랑스럽기도 했다. 몰래 당신을 탐하는 내 자신이 역겨웠지만 당신은 아마 용서해줄 것이다. 뱃구레 너머 아기의 발길질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내 장판을 벗어난다. 멀디 멀게만 느껴지는 노끈을 잡아당겨 방의 불을 밝혔다.

  붉다.

  다리 사이를 타고 흘러내시는 선혈이 너무도 붉었다. 두려움에 가빠져 오는 숨을 다잡고 구석탱이가 처박힌 하얀 꽃무늬 시트를 잡아당겨 바닥을 긁어 닦아냈다. 눌어 붙은 핏자욱이 갈빛 장판 위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내려다 보다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는 끊임없이 내 다리 위를 기어 내려가고 있다. 손에 쥐고 있던 시트를 다시 구석에 집어 던지곤 그 위에 뱀이 똬리를 틀듯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무서웠다. 뱃거죽 너머에서 무엇인가 요동치고 있었다.

  있잖아, 있잖아. 안 일어날 거야?

  그대에게 내뻗었던 손을 다시 갈무리하며 심호흡 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 저 죽은 동태 눈깔이 이제서야 나를 직시해도 괜찮아. 뱃속의 아가가 피를 토해내도 괜찮아. 당신은 이곳에 있었고 나도 이곳에 있었다. 우리에겐 아이가 있었고 당신에겐 과거가, 나에겐 미래가 있었다. 끊임 없이 쏟아져 내리는 하혈 속에서 나는 멍하니 떠올렸다. 그래,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우리는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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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통증  (0) 2013.12.11
Posted by 토박

2013. 12. 12. 14:39

프로그램 "아발론"

  뻑뻑한 눈을 애써 슴벅였다. 안구 뒤편이 무겁게, 또 지독하게 아려왔기에 나는 다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귓가에선 가느다란 흐느낌이 울리었다. 그 흐느낌의 주인공은 굳이 고갤 돌려 바라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 울음을 듣고선 시덥잖은 감상에 빠지기 보단 수십 번은 해왔던 푸념을 누차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또 실패다. 입술 새로 나직한 한숨이 삐져나왔다. 애써 힘을 내 말라 비틀어진 삭정이처럼 앙상하기 그지 없는 손을 들어 울고 있는 유이든의 손목을 붙들었다. 내 손등엔 바늘이 꽂혀 있었다. 누리끼리한 색의 포도당 수용액이 튜브를 타고 흐르다 혈관에 침두하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 손길에 그녀는 황급히 두 손에 파묻었던 고갤 든다. 그리고 발작하듯 소리쳤다.

 

  "정신이 들어? 벨? 벨!"

 

  쨍그랑하고 거울이 깨지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나는 유이든의 손목을 붙들었던 손으로 귀를 틀어 막으려다 혈관 속에서 오묘한 각도로 틀린 바늘에 살갗을 찔리는 바람에 작은 신음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더럽게 아팠다. 괜찮아? 그녀가 물어 오는 바람에 나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미간은 여전히 펴지 못한 채 말이다.

 

  "걱정했어."

 

  유이든은 격정적으로 내뱉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달아 오르는 것을 확인한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반응에 괜스레 코끝이 시큰시큰했다. 발갛게 물든 눈이 결국 눈물을 떨구어 낸다. 나는 손을 뻗어 유이든의 눈초리에 매달린 눈물 방울을 조심스레 훔쳐내었다.

 

  "벨, 정말로 걱정했어. 네가 눈을 뜨지 못하는 게 아닐까 정말로 무서웠어! 오, 제발 다시는 이러지 말아, 벨!"

 

  나는 누구보다도 네가 소중해, 벨.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고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다. 나는 그녀에게 약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이든은 그런 내 속내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계속해서 나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응? 벨? 벨? 나는 말없이 사랑스러운 나의 약혼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얼굴을 묻은 오른쪽 어깨 께가 눅눅하게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껴안자 손등의 튜브를 타고 피가 역류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결국 혀를 한 번 끌 차곤 그녀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괜찮아, 벨? 미안해."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째선지 유이든이 이 이상 나의 거짓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 고물고물 혀를 굴리다 어줍잖은 대꾸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이 정도로 죽진 않아, 유이."
  "그래, 그렇겠지."

 

  유이든은 키들거리며 침대 위로 털썩하고 쓰러졌다. 그래, 그럴 거야.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린다. 나는 그 목소리에 묻어난 수마를 알아채곤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늘 환하고 단정히 손질되어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챘다. 배냇물도 채 마르지 않은 갓난아기가 옹알이듯 유이든은 무어라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연신 중얼거렸다. 만일 그녀가 이제껏 나를 간병하느라 이리도 지쳐 버린 것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녀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죄인일 수 밖에 없었다.

 

  "잘 자, 유이든."


  나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약간 짭조름한 맛이 나긴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기로 한 채 나 또한 베개에 머릴 뉘였다. 얼마나 눈을 뜨지 못한 채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유이든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저번보다는 덜 했던 모양이었다. 한 사나흘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갤 저었다. 고롱고롱하고 유이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금은 망연한 기분으로 고갤 들어 천장에 석고가 발린 채 고정되어 있는 내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기괴하게 비틀려 뜯어져 나가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제 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오른쪽 다리는 이제 두렵지 않았다. 약간의 회의감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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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2. 14:34

Cristallonotte

  하오의 베키오 다리 위는 언제나처럼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나이 든 보모 하나와 시녀 하나가 곁을 지키는 붉은 드레스의 소녀는 조심스러이 발걸음을 옮겼다. 행인들을 붙잡고 흥정을 하던 상인들은 그녀 무리를 일별하곤 언제나처럼 공손한 인사를 건넨다. 아낙들은 다 해어진 치맛자락을 붙잡고 사내들은 햇볕은 근근히 가려주는 제 모자를 벗곤 허릴 숙이며. 제법 격식을 차린 것이었다.. 본래 공기 중을 뒤덮고 있던 고약한 도시의 내들은 더욱이 고약한 썩은 고기 냄에게 먹혀 들어간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소녀가 한발짝 앞으로 나아갈 적마다 사랑스러운 곱슬의 금발이 기류에 나부댔다. 붉은 천자락이 더러운 시장 바닥을 한 번 훑는 것을 먼 발치에서 마주한 소년은 숨을 삼켰다. 소녀는 고갤 들었다. 소년은 그녀의 푸른 눈 속에 깃든 애염愛艶을 보았다. 그리고 소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마치 제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석류나 목련 따위가 바닥으로 추락하듯, 톡─ 하고.


  「오랜만이에요, 알리기에리!」


  ─그것은 각인이다. 소년은 입술을 달싹인다.


  「……오랜만입니다, 포르티나리 양.」


  잠시간의 침묵 뒤에 대답한 그는 숨을 삼켰다. 그 눈에 어린 이채와 우수를 소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년은 검고 칙칙한 비애에 젖어 탄식했다. 날카로운 창칼로 폐부를 찔린듯한 가쁜 숨이 튀어나오리라 전연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러나 놀라고 말았다. 낭창하고 맑은 목소리와 해사한 소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아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환상적이다 못해 환상이었다. 다리 위의, 귀족들을 위한 비밀 통로가 아닌 다리 아래의 시민들과 어우러진 그녀는 마치 여신상 같았다. 오랜만이에요, 알리기에리. 그 한마디에 무의미했던 그의 이름은 소녀가 되었고 성어聖語가 되었다. 이름의 의미를 부여받은 소년은 소녀의 시선을 좇아 다리 너머 아르노강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로마 시대의 마지막 유산은 소녀에게 지엄하고 숭고한 배경을 선사해 주었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아른하게 멀어지는 소녀의 붉은 뒷태가 망막 너머에 아로새겨지는 것을 그는 그토록 염원했다. 아름다운 이, 나의 그대, 사랑스러운 나의 소녀! 소년이 마침내 다시 눈을 떴을 적, 소녀는 더 이상 그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1283년 5월 1일, 피렌체에서의 재회이었다.

 

 

 

  「자네는 날이 갈 수록 수척해 지는군.」


  포르티나리Folco Portinari의 말에 알리기에로Alighiero di Bellincione는 고갤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네. 수척해 지다니. 그런 말은 하지 말게. 그리 중얼거리는 알리기에로의 얼굴이 퍽 어두웠기에 포르티나리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만다. 포르티나리는 알리기에로와 마주 보는 탁자의 의자를 빼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알리기에로는 말이 없다. 벽면의 투터운 커튼을 걷어내자 환한 햇살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정원에서는 한 소녀가 잔디밭에 앉아 꽃을 꺾어대고 있었으며 그 옆엔 미동 않는 소년이 서 있었다. 포르티나리의 딸 비체Beatrice Portinari와 알리기에로의 아들인 두란테Durante degli Alighieri이었다. 유모가 황급히 손에 장미를 쥔 비체에게 다가가 조곤조곤 무슨 말을 건넨다. 이내 비체의 손에서 붉은 장미는 떠나간다. 아마도 꽃을 꺾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전해주었던 것이리라. 포르티나리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주어가 없었지만 그 말뜻을 알리기에리는 퍽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리기에리 가家는 본래 피렌체의 귀족 가문이었으나 점차 쇠퇴했고 시방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알리기에리는 그러나 가문의 가주였고 자신의 스러져 가는 자존심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대부업과 임대를 통해 근근히 생활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는 아마 지금 알리기에로가 자신의 업을 제 아들에게도 물려줄 심산인지를 묻는 것이리라.


  「아니. 나는 그가 이 일을 하길 윈치 않네. 그에겐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


  10살 난 사내아의 시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내 아들은 특별하네. 나는 그가 조금 더 교육 받길 바라. 알리기에로가 조금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포르티나리는 고갤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창 밖의 두란테에게로 향해 있었다. 무엇을 그리 바라보는가? 알리기에로가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바라본다. 두란테는 민충히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비체일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선 소년의 정수리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집아의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정원과 저택의 창문까지의 거리는 퍽 멀었는데도 비체의 목소리는 선연했다. 그녀는 두란테의 손을 잡아 잔디밭에 앉히었다. 털썩하고 솜 인형이 탁자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듯 두란테는 그녀의 손에 의해 아래로 가라앉는다. 안네Anne! 안네! 비체가 유모를 찾는 소리가 들려온다. 포르티나리는 두란테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말한다.


  「도나티 가家와 약혼을 준비 중이라고?」
  「젬마Gemma di Manetto Dona-ti를, 두란테는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
  「그것은 모르는 일이야.」


  적어도 두란테는 그녀를 싫어하진 않아. 두란테의 감정을 아버지인 그가 어찌 아느냐는 포르티나리의 지적에 알리기에로는 퉁명스러이 내뱉었다. 몰락해가는 알리기에리 가와 신흥 세력으로 떠오르는 포르티나리 가의 가주들은 퍽 무람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찌 보면 어색하고 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알리기에로는 생각했다. 그들은 그러나 오랜 기간 서로를 알아 왔으며 친구처럼 거창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구면인 사이였다. 포르티나리는 책략적인 이였고 포용의 대가이기도 했다. 알리기에로는 그런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포르티나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의 대부업에 조금이나마 손을 빌려주겠다 흔쾌히 수락했을 테지.
  정원에서의 파티는 한창이었다. 파티의 주최자인 포르티나리를 오래토록 붙잡아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알리기에로는 최대한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포르티나리는 마침내 손으로 걷어내었던 커튼을 다시 내렸다. 촤르륵 하고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이도를 간지럽힌다. 알리기에로는 까칠하게 자라난 제 턱의 수염을 한 손으로 쓸어보다 포르티나리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지식과 덕의 차는 드러나지 않지만 즉물적인 차이는 이렇게 민충한 이에게도 확연히 드러나고야 만다. 이제껏 펜만 쥐고 살아온 모양인지 포르티나리의 손은 퍽 곱기만 했다. 아마 그의 딸도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황급히 포르티나리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그가 말한다.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세.」


  사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한 시간이었다. 그것을 자각한 알리기에로는 포르티나리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그래. 때가 늦었어. 포르티나리는 응접실 천장의 소규모 샹들리에의 촛불을 무연히 바라보다 알리기에로의 앞에 다시 마주 앉는다.
  안네! 안네! 비체는 여전히 제 유모를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화관을 만드는 법을 잊었어요. 그렇게 말하고선 애타게 제 유모를 불러대던 비체는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유모-안네-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화관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는데 안네는 답이 없어. 투정을 부리듯, 어리광을 부리듯 딱 9살 난 계집아의 꼴이었다. 두란테는 생기에 붉은 기를 띠는 비체의 양볼을 가만 바라보았다. 어린 소년의 내면에서는 사특하고 달큰한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었다. 비체는 고갤 돌려 두란테를 쳐다본다. 언젠가 보았던, 백정의 손에 모가지를 틀어 잡혔던 닭처럼, 두란테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맑은 눈이었다. 비체의 푸르른 눈을, 두란테는 감히 마주 바라볼 수 없었다.


  「손을 놓아 주어요, 포르티나리 양.」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미미한 흥분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으나 비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제 손바닥을 벗어나는 커다란 그의 손(9살 난 비체에게 10살 난 두란테의 손은 무척이나 커 보였다)을 거머쥐었다. 어째서요? 비체가 조심스러이 물어온다. 우아하고 올바른 소녀의 악센트에 두란테는 현기증을 느끼며 이성을 거머쥐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싫어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입술은 거짓되어 있을 따름이다. 10살 난 사내아가 하기에는 퍽 속세에 절어 버린 말이었고 비체는 그와 제가 손을 맞잡는 것과 제 아버지가 가지는 연관성을 떠올리기엔 무척이나 어린 듯했다. 그녀는 고갤 갸우뚱하며 두란테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버지가 왜요? 무람없는 눈동자가 캐물었다. 두란테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때에 맞지 않게 손을 뻗어 비체의 환히 빛나는 머리카락을 손에 뜯어내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선량한 비체는 이를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제 아버지는 포르티나리 씨에게 어음을 받기 위해 온 것 뿐이지요. 포르티나리 양, 당신은 나보다 위에 있어요.」
  「나는 알리기에리의 앞에 있어요.」
  「아니, 아니. 당신은 나의 위에 있지요.」


  비체는 두란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의 말을 정정하려 들었다. 두란테는 처음으로 약간의 회의감과 함께 그녀의 앞에서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스스로 내뱉은, 당신은 나의 '위'에 있다는 그 말은 도리어 두란테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가 폴코 포르티나리와 대화를 끝내면 자신은 이 포르티나리의 저택을 떠나야만 했다. 아아. 두란테는 결국 비체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어 몇 가닥을 뽑아냈다. 돌발적이고 기습적이었던 그 행동에 비체는 아야! 하는 신음을 내질렀다. 두란테는 당황하여 작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포르티나리 양! 그것은 그러나 말뿐이었다. 두란테는 제 손에 쥐여진 짙은 황금빛 머리카락 네 가닥을 비체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낡고 해어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비체는 옅은 분에 몸을 떨었으나 이내 영애답게 처신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한 손으로는 여전히 뽑힌 머리카락이 있던 곳을 꾹꾹 누르며. 바로 그때였다.


  「두란테. 이만 가자꾸나.」


  안절부절못하며 비체의 안색을 살피고 있을 적 알리기에로가 두란테의 손을 쥐며 잡아 끌었다. 어른들 사이의 대화는 끝난 모양이었다. 두란테는 비체를 이 이상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픔에 잠겼으나 당장은 이 상황을 회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 또한 다른 손에 거머쥔 채였다. 그는 제 아비의 우악스런 손길에 따라 잔디밭에서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었다. 비체는 제 아비가 저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한 자줏빛을 띠는 쉬폰 자락이 팔랑하고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폴댄다. 이리저리 꺾어 만들어보던 조잡한 화관을 팽개친 그녀는 제 아비에게로 달려갔다. 두란테는 바닥에 남겨진 시든 화관을 주워 들어 그 또한 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슨 짓이냐, 두란테. 알리기에로가 꾸짖듯 말했으나 그 뿐이었다. 두란테는 고갤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체는 제 아비의 품에 안겨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땐 조금 더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군.」


  포르티나리가 말했고 알리기에로는 씁쓸히 고갤 끄덕였다. 비체는 푸른 두 눈동자에 말가니 정원의 전경을 담은 채였다. 두란테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인가? 이 뿐인 만남인가? 비체의 뺨에 작별의 키스를 내려 주어, 두란테! 누군가가 속삭였으나 두란테는 저의 충동을 좇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제 아비의 손에 끌려 거대한 저택의 대문을 지났다. 이대로 끝일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머니 속의 시든 꽃 뭉치와 네 가닥의 머리카락을 거머쥐었다. 비체의 그 조막만한 손이 품고 있었던 온기는 그토록 가까웠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서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두란테는 심장을 죄는 고통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누구였어?」


  비체는 붉은 드레스의 천자락을 가벼이 들어 올려 벗었다. 옆에 있던 하녀들을 물리자마자 큐베는 여상스레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녀에게 물어 온다. 그라뇨? 비체는 반문했고 큐베는 지나가는 어조로 강조했다. 아까 안네와 함께 갔던 다리! 거기에서 인사했던 아이 있잖아? 비체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큐베, 두란테는 아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늙어 버렸어요. 그는 소년이죠. 그러나 큐베는 듣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이 두란테야? 그리고 이어지는 가벼운 하품.


  9년이 흘렀다. 비체는 어릴 적 가든 파티 때 단 한번 마주했던 두란테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 그대로였고 그를 인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스치다 눈이 마주쳤기에 한 인사일 뿐이었다. 두란테는 그녀의 인사를 썩 달가이 여기지 않은 것 같았고 때문에 그녀는 어째서 큐베가 그에 대해 궁금해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큐베, 배는 고프지 않아?」


  수플레가 있어? 활달한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그럼, 있어. 비체는 드레스를 옷장에 넣어두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던 두란테의 휑뎅그렁한, 공허한 얼굴은 점차 스러져 간다. 안네, 안네! 수플레가 있어? 비체는 경쾌한 마르주카를 추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말 마법소녀가 되지 않을 거야? 그런 베아트리체의 등뒤로 큐베의 재질이 들려왔다. 3년째 반복되어 온 질문이었다.

 

 

 

  두란테는 한껏 고양된 숨을 내뱉으며 방안을 서성인다. 그는 격동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9년 만이었다. 9년 만의 재회! 그것도 같은 날!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와 제가 첫만남을 가진이 정확히 9년만에! 환희에 찬 눈물이 샘솟았다. 그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사랑스러움의 원천을 보았고 처녀의 숭고한 머릿결에 얼굴을 묻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것은 그러나 이내 끔찍하고도 아픈 것으로 미래로 화해 스러졌다. 베아트리체는 그의 여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현실이었고 공포였으며 크나큰 상실이기도 했다. 두란테는 하얗게 질린 입술로 웅얼거렸다. ─내 그네를 잊지 않으리. 바보 같은 말임을 안다. 두란테에겐 젬마가 있었고 그녀와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는 알리기에로의 가장이었다. 더이상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체 하며 뮤즈와의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아트리체는 결코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의 여인, 나의 태양! 그녀는 그저 음험한 속내를 통해 탐하는 것만으로도 죄악이 될 수 있는 소녀였다. 적어도, 두란테에게 있어 그녀는 그러한 존재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저 우아하니 모든 것을 수용하던(그리 보였던) 피렌체에선 격렬한 당파 싸움이 벌어졌다. 차피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달가이 여길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대리자인 교황을 지지하는 겔프당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당으로 나뉘었으며 일부에선 고아하지 못한 무력과 창칼이 대립하였다. 때는 1284년이었다. 폴코 포르티나리의 얼굴에선 하루도 어둠이 가실 날이 없었으며 그것은 그의 아내인 율리에트 포르티나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교황의 이름 아래, 하나님의 이름 아래 살아가길 원했다. 비체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따금 이루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사로잡혀 제 부모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정계의 평화란 귀족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때문에 후에 겔프당이 권력을 잡았을 적 비체는 편안할 수 없었다. 싸움은 남아 있었다. 그 끝이란 애초부터 기약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하루하루가 끊어질 듯 불안했다. 시민들은 곡괭이 따위를 들고 귀족들은 펜촉을 들고 서로를 모함하기에 바쁜 일상은 이어져 온다.


  「비체, 이 어미는 두렵단다.」


  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체는 한없이 작아 보이는 제 어미의 손을 잡고 뺨을 댔다. 차가운 손이었고 따뜻한 뺨이었다. 그녀는 눈을 추켜 떠 큐베를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알아 들은 것인지 큐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비체는 입을 연다.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주름진 어미의 손은 앙상하다. 그러나 우아하다.


  「엄마, 다 괜찮을 거예요.」


  거짓말이다. 괜찮지 않을 터다.


  포르티나리 가는 피렌체의 중심에 서 있는 이상 더는 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었고 외면할 수조차 없다.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비는 아직까지 나겁했던 천성을 버리지 못한 채였다. 비체는 그녀의 어머니를 침대에 손수 뉘이곤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커다란 저택의 복도는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에 잠겨 있다. 열여덟이다. 마냥 어리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당파 싸움이나 세금 따위의, 남성들이 관할하는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피부로, 살갗으로 느낀 것은 정말 우연찮은 때였다.
  ㅡ더러운 교황의 개들 같으니!
  제 곁을 스치던 이름 모를 청년의 경멸 어린 어조, 안네에게 달려들며 기벨린당의 당원임을 자처하던 늙은 백정. 그저 사상의 차이에 이토록 반발하는 그들을 비체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와 문을 걸어 잠궜다. 후에서야 알게 된 이야기이지만 서민들 간의 당파 싸움은 귀족들보다도 더욱 치열했다. 그들은 졸로 쓰이기엔 너무도 현명했고 때문에 너무도 괴롭게 살아가고 있다.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는 안네의 설명에 비체의 얼굴을 새하얗게 질려만 갔다.


  「괜찮아, 베아트리체.」


  큐베가 말했다.

  비체는 지금이 한밤중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눈을 뜬다. 역한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 마주한 커튼이 무자비하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푸른 눈이 어둠 속을 방황하다 잡아낸 것은 남자였다. 한 남자. 비체는 공포에 질려 이불을 던져내고 복도로 뛰어 나가기 위해 침대를 빠져 나왔다. 도망친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비체는 그제야 역한 냄새의 근원이 커튼이었음을 알아 냈다. 아름답던 실크 커튼은 검은 연기와 구역질 나는 향내를 남기고 점차 사라져 간다. 발에 끼워 신었던 실내화가 벗겨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그녀는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억센 손에 머리채를 쥐여 잡힌다. ㅡ더러운 교황의 개들 같으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챈 청년이 속삭였다.


  「낯이 익지? 그렇지 않아?」


  청년은 그녀를 불타는 발코니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나이트 가운이 말려 올라가 돌바닥에 종아리가 그대로 쓸렸다.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은 비체는 몸부림 쳤다. 그만 둬! 그만 두란 말이야! 청년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틀어쥔 손을 들어 올려 정원을 향했다. 비체는 자신이 살던 저택이 불타는 것을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끔찍했다. 끔찍하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포르티나리 가를 습격한 것은 평민들이었고 과격파 기벨린당 당원들이었다. 그들은 이 이상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 비체는 진정 윗사람들의 졸이 되고 싶은 것인가를 따지고 싶었으나 두려웠다. 그저, 두려웠다.


  「교황을 믿은 보상이야!」


  청년이 외쳤다. 그녀는 무고했으며 그녀의 아비와 어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들을 단죄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타는 정원으로 기괴하게 목이 틀린 비체는 헐떡이며 신음했다. 그녀의 방 안으로 처들어 온 이들은 옷장 속의 드레스들을 불테우고 침대에 횃불을 던졌다.
  세상은 붉게 물들었다.


  「난 널 도와줄 수 있어, 베아트리체.」


  발코니의 난간 위로 큐베는 가벼이 올라섰다. 나는 너의 마지막 동앗줄이야. 이렇게 죽고 싶어? 이렇게 끝내고 싶은 거니,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 달콤한 유혹이었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며 베아트리체는 제 머리채를 쥐고 있던 청년이 방심한 새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리고 눈물 범벅이 된 채 소리쳤다.


  「─아니!」
  「그렇다면 나와 계약을 해서 마법소녀가 되는 거야!」

 

 

 

  두란테는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닫고는 그녀를 응시했다. 젬마의 붉은 드레스 위로 생애 단 두 번 마주했던 소녀의 뒤태가 아련하게 겹쳐졌다. 여보. 젬마는 그리 말하며 뒤를 돌아 본다. 두란테는 그녀가 뒤돌았을 적 저를 담는 두 눈동자가 비체의 것이었다면 하고 나직이 탄식했다. 젬마는 천천히 벽에 걸린, 말라 비틀어진 꽃뭉치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 화관은 치우는 게 좋을까요?」


  두란테는 안락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 친다.


  「아니, 안 돼! 젬마, 그건 당신이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야!」


  흥분한 두란테의 어투에 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란테는 고갤 들어 갈빛으로 변색된 꽃잎이며 이파리들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홉 살 난 소녀게 제게 건네 주었던 추억이었고 마음이었다. 꽃을 묶은 리본의 새엔 마치 실낱 같은 무언가가 네 가닥 끼여 있다. 두란테는 꽃뭉치를 훑던 도중 눈을 홉떴다.


  「젬마, 당신 혹시 이것에 손을 댔어?」


  부드럽지만 채근하는 어조에 젬마는 고갤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따금 그는 전혀 이상한 곳에 핀트를 맞추곤 했다. 그것을 원망할 필요는 없었지만 젬마는 그것이 못내 섭섭했다. 아뇨, 손 대지 않았어요. 그녀는 두란테가 바라보는 곳을 응시한다. 두란테는 덜덜 떨려 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꽃뭉치의 끝에 금방이라도 목이 꺾어질 듯 자리하고 있던 데이지는, 사라져 있었다.

 

 

 

  손 안에서 달걀 같은 보석이 굴렀다. 비체는 그것을 양광에 비추어 보며 두 눈을 크게 떠보였다. 양광은 비체의 붉은 드레스의 슬리브와 자색의 보석을 투과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약간 탁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보석은 깨끗하고 청명했다. 자주빛 보석의 위에는 왕관 같은 구조물이 얹혀져 있다. 퍽 아름다웠다.
  마법소녀. 그 어감은 참으로 우스웠으나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다.


  「─그건 소울젬이라고 불러.」
  「무슨 뜻이야?」
  「영혼을 담은 보석이라는 뜻이지.」
  「아름다워.」


  큐베가 흐응-, 하고 관심 있는 척을 한다. 소울젬은 너 자신이야, 베아트리체. 비체는 고갤 끄덕였다. 기벨린당의 세력이 약화된 지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비체는 이따금 그녀 스스로가 두려워 졌다. 그 날 밤 이후로도 몇 번의 습격이 있었다. 그때 저는 어찌 하였던가. 손 안에서 힘없이 꺾여 나가던 청년의 목이 생생했다. 마치 목련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듯이, 다만 툭 대신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가까이서 처단을 자행하는 것이 힘들 땐 창으로 그들의 목을 꿰뚫었다. 어째선지 피는 흘러 나오지 않았다. 인간들은 마녀들보다 약했다. 비체는 그것이 슬펐다. 너무도 덧없는 생명이지 않은가.


  「큐베.」
  「응, 베아트리체.」
  「결혼을 해도 마법'소녀'일 수 있는 거야?」


  큐베가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기실 그는 늘 미소 짓고 있었지면서도 말이다. 비체는 자신의 약혼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올해 스물하나가 되었다. 시모네 데 바르디는 좋은 남자였고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그와 결혼하길 바랬다. 때문에 비체는 자신이 결혼 후에도 소녀일 수 있을 지를 큐베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음, 그건 명칭일 뿐이니까. 그가 답한다. 비체는 난감하게 깔깔대며 웃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너와 함께 있겠구나.」


  나는 가끔 네 곁을 떠나곤 하니 계속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기약 없는 비체의 말을 큐베가 정정했다.

 

 

 

  마녀는 그 무엇 하나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째서 나를 선택한 거야? 비체는 울며 소리쳤다. 그녀의 품속엔 피를 토해낸 제 어미가 죽어 있었다. 그 가슴엔 커다란 천공이 뚫려 있다. 흉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비체는 그 상처가 무엇으로 인해 만들어 진 것인가 너무나도 쉬이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에선 성장 중에 있는 여성을 두고 '소녀'라고 부른다며?」


  ─그렇다면 곧 마녀가 될 너는 마법소녀라 불러야 마땅하지.
  알고 있었다. 비체가 바랐던 것은 '우리'의 구존이었다. 나는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니었어! 행복하길 바랬어! 큐베는 중얼거린다. 다들 그렇게 말해, 베아트리체. 비체는 자신의 어미를 내려다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꿈인 줄로만 알았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악몽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흔들거리는 시야 속 제가 창을 찔러 넣은 것이, 마녀이길 그토록 바래왔다. ─이건 정당화될 수 없어. 눈물이 흘렀다.


  「아프지?」


  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힘들어! 죽어 버려,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 너는 언제까지고 바보일 수 밖에 없어! 아프지? 아팠다. 형용할 수 없을 만치 온몸이 저릿했다. 큐베의 앞에 들린 소울 젬이 변색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비체는 그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소울젬이 검게 변하면 말이야, 베아트리체, 너는 마녀가 될 거야.」


  텅-, 하고 칼이 목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 올랐다. 퐁퐁퐁. 마치 샘솟듯이. 비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 오른 것이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어째서, 죽은, 거야?」
  「네 힘이 약해지고 있으니까.」
  「강해지려면 어떡해야 해?」


  ─마녀를 쓰러뜨려!

 

 

 

  외로웠다.
  힘든 것 같기도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마녀가 된 걸 축하해, 뷘-글래.」


  마녀는 꿰매진 두 눈을 뜨는 것을 포기하곤 세번째 눈으로 침입자를 바라본다. 부정형의 몸체와 토끼를 닮은 귀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D.
내가 태어난 이래 빛의 하늘이 자체의 공전에 따라 아홉 차례 똑같
은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내 맘에 그리던 영광스런 여인이 내 눈 앞
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
녀를 베아트리체라 불렀다.
                                       ―《새로운 삶》2

그런 뒤 앞에 기록한 바와 같이 이 거룩하신 여인이 나타나신 이래
정확히 아홉 해가 될 만큼 많은 날들이 지나 그 마지막 날에 이르
렀을 때 이 찬탄할 만한 여인이 두 명의 고귀한 여인들 사이에 아
주 하얀 옷을 입고 내게 나타났다.  (……) 나에게 덕스러운 태도로
인사하였다.
                                      ―《새로운 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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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글러 연말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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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통증

  분명 부모가 죽기 전 캐롤라인 스스로의 인생에도 슬픈 기억들은 퇴적물처럼 진득하게 쌓여 층을 이룬 채였다. 때문에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가 죽었다. 자매가 묻혔다. 그 사실은 너무도 현실적으로 눈 앞에 들이 밀어졌다. 힘들었다.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째서 그 전까지의 모든 심통을 무시한 채 발현되고 있는가에 대해. 그것들은 끈덕지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끈덕진 타르의 가장 밑바닥에 남은 더욱 끈덕진 찌꺼기 같기도 했다. 삶이 그 완성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온전성이라고 융은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결함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말 또한 잊지 않고서. 캐롤라인은 그 말에 곧잘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지만 더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은 자신을 방해하는 결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져 두려운 결여일 뿐이었다. 제게 있어 무엇이 결여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그 자체가, 재자리 걸음을 반복하는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결함이자 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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