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1. 15:56

프로그램 "아발론"

1

  헤일의 눈꺼풀이 기나긴 정적 끝에 파르르하고 떨려왔다. 이빨에 너덜너덜하게 찢겨 보랏빛이 도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자 아릿한 통증이 도는지 헤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만난 이래 가장 인간적인 반응이었으나 감흥은 이에 그치고 말았다. 멍이 든 것 같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중얼거려 보지만 헤일은 어줍잖은 거짓말에 속아주지 않을 터였다.

 

  "……너와 이런 짓을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어."

 

  그의 조막만한 머릿속에 든 쓰잘데기 없는 죄책감을 알고 있다. 나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만 둬야 해, 벨. 헤일의 손은 어느새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이내 매끄러운 몸짓으로 내 손을 제 입술에서 떼어냈다. 어깨가 무거웠다. 부드럽지만 매몰찬 거절의 몸짓에 가슴 한 켠이 아렸다. 헤일이 이상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내가 수줍은 숫처녀처럼 그가 뿌리친 내 손을 다른 손으로 감아 쥐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하, 하고 허탈한 웃음이 입술 새로 튀어 나왔다.

 

 

2

  주먹을 쥐자 손 안에서 타들어 가던 편지지는 바스라져 바람결에 흩어졌다. 벨은 제 손바닥에 각인처럼 남은 검은 그을음을 응시하다 헤일을 올려다 보았다. 목덜미를 덮은 헤일의 검은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리며 제 시선에 반응하는 것만 같다. 벨은 눈을 끔벅였다. 무슨 일이야? 헤일이 걱정스럽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어온다. 오른쪽 눈을 가린 벨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 손길은 퍽 상냥하다. 벨은 연매 묻은 손을 털어냈다. 미미한 가루들이 방 안 적막한 공기 중을 떠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헤일이 벨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리고 답했다.

 

  "아무 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야."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헤일은 자신을 노려보는 보는 벨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셰이드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벨? 꼭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제 아내를 추궁하는 듯한 어조다. 헤일은 언제나 상냥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상냥함과 벨의 무언가를 맞바꾸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비치지 못했다. 셰이드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벨. 양모 카펫처럼 보드라운 목소리로 헤일이 재차 추궁해 왔다.

 

  "그만해, 셰이드!"

 

  벨은 헤일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질렀다. 돌아오는 헤일의 반응은 그러나 없었다. 헤일은 뿌리쳐진 제 손을 무연히 내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셰이드.

 

  "셰이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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