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2. 15:12

Q

  뽀도독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 들어 있던 알약 열 알이 바스라졌다. 뜨겁게 녹인 플라스틱과 흡사한 향과 맛이 났다. Q는 계속해 입을 고물댔다. 마침내 입 안 그득 알약들이 모두 바스라졌던 때, 그녀는 노오란 가루들을 밀어내려는 목구멍을 저주하며 물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기를 잊은 식도에 컥컥대며 목을 움켜 쥐고는 한참을 기침한다. 반사적으로 눌린 누선은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Q는 바닥에 유리컵을 내던지고는 주저 앉았다. 누런 위액이 코 밑으로 흘러내렸다. 쓰라리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대다 Q는 제 목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처음엔 검지, 그 다음엔 중지, 그 다음엔 네 손가락. 구역질 나는 제 몸을 녹여 담그고 싶었다. 꿀렁이며 뱃속을 휘젓는 핏물을 모두다 뽑아내 들이마신다면 조금은 나아질까. 희미하게 경련하는 손을 잘라내고 싶었다.

 

  언제부터였는가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잠들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다만 희미하게 떠올릴 뿐이다. 죽은 듯이 잠들었다 깨어나길 반복해 온 그녀에게는 잠들 수 없다는 꿈이 악몽이었다. Q는 제 음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붉은 빛이 도는 피가 손가락 끝에 묻어 나온다. 하혈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시커멓게 산화된 피가 잠옷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애기집 따위는 그녀에게 불필요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테니까. 붉게 부어오른 눈가가 따갑다. Q는 자신의 손등을 세게 물어 뜯었다. 살점은 튿어져 나오지 않는다. 짐승이 물어 뜯은 것만 같은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Q는 눈을 감고 다리 사이 엉겨 붙은 핏덩어리를 잡아 당겼다. 물컹하다. 끈적하게 손에 묻어나지만 미끌미끌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감촉이었다. Q는 바닥에 누워 허우적댔다. 손 끝에서 잡아챈 것은 정제된 아티반 통이다. Q는 기계적으로 통을 열어 입구를 입에 머금었다. 누런 알약은 계속해 입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끊임 없이, 그녀의 의식이 멀어지기 전까지. 입을 벌리면 혀가 노란 색으로 변해 있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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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5:09

Q

  포크의 끝에 짓눌린 방울 토마토가 압력을 이기지 못한 채 퍽하는 소릴 내며 터져 오른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접시가 긁혀 나갔다. 그 소리에 J는 고갤 든다. Q는 고갤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얇은 금테 안경을 코끝에 걸친 J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이었다. 구역질을 불러 일으키는 검은 눈. 서늘한 그 눈매는 그러나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았다. Q는 가빠져 오는 제 숨결을 느끼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어째서? 머뭇거리지 않고 씹어 내뱉었다.

 

  "……시끄러워."

 

  그가 어째서 이 방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마산댁은 그가 바쁜 사람이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는 평소 상당히 바빠 보였다. Q는 그가 평생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다. J는 이에 답하듯, 일말의 흥미조차 내비치지 않겠다는 듯, Q를 향하던 시선을 다시 손에 들린 책으로 내리깐다. 아니,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포악한 Q의 손에 들린 단죄의 칼날은 마악 토마토 한 마리를 더 죽인 참이다. 그녀는 쿵쿵대며 식탁보 덮인 유리를 내려 찍어댔다. J는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는 계속해 책을 읽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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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5:04

로즈마리가 피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핸드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잠시간은 억울한 마음에 섪어 눈물이 차올랐지만 이내 어디서부터 기원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났다. 6시간이 지났다. 그에게선 연락 한 통조차 오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는 퍽 처량맞은 자세였고 내 기분 또한 그에 걸맞게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고갤 들어 하얀 천장을 응시하다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걸어가 커피를 내렸다.

  ─네가 내 인생을 망친 건데,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여상한 표정으로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그에게 헤어지겠다고 말했었다. 늘 친근하게 목 께를 애무해왔던 손은 그러자 거칠게 내 멱살을 틀어쥐었고 나는 숨이 막혀 쿨럭였다. 그는 미쳤어! 내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고 나는 제법 센 힘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며 그 반동으로 머리를 바닥에 찧었지만 아픈 것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거칠게 나를 일으켜 세웠고 뺨을 후려갈긴 후 급하게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도망자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나는 소파 위에 걸쳐진 그의 양복 재킷을 바라보았다. 저거, 안 가져다 줘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나는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나. 그의 말에 웃으며 고맙다고, 사랑한다 속삭였어야 했나?

  차가운 바닥에 그렇게 남져진 채 몇 분이고 운위했지만 결국 답을 도출해내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아냈다. 화가 났고 슬펐으며, 또 황당했다. 그에게 얻어 맞은 뺨이 아직도 화끈했다. 손자국이 났을까.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5분 동안 내린 커피를 5초만에 다 마셔버렸다. 그는 내게, 이혼을, 했다고, 했다. 이혼. 이혼이라.

  나는 하얀 도기 커피잔을 부엌 바닥에 내던졌다. 코팅된 대리석과 마찰한 포트 메리온의 커피잔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졌다. 저 위를 걷고 싶다. 앙금처럼 쌓인 감정의 노폐물이 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도기 조각을 치우고 젖은 걸레로 바닥을 닦아냈다. 카페인의 효과는 제법 빨리 나타났다. 심장이 쿵쾅댔고 대뇌가 한껏 고양되었다. 여전히 그에게선 연락이 없다.

  나는 그의 자극적인 말에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책임전가에 화가 난 것 또한 아니었다. 그의 손찌검 또한 내 도덕심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 폭력에는 당위성이 숨어 있었다. 내게는 그것은 거부할 핑곗거리가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마지노 선을 넘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는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고 금쪽같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으며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아파트와 은색의 매끈한 벤츠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판단력은 덧없이 뭉게져 바닥에 내버려진 것이다. 이혼. 이혼이라. 나는 다시 한 번 더 뇌까린다. 수 십 번 중얼거린 이혼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내 입속에서 이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미안해, 나 사실은 게이였어? 우리 이혼하자? 아니면,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지러운 마블링marbling에 정신이 혼미했다. 카페인 때문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 드러누워 무소음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다. 퇴근을 한 후 그를 만났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와의 저녁 약속이 이렇게 취소되었고 나는 이제 커피를 한 잔 한 후 침대에 누워 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정장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옷을 갈아 입는 것조차 귀찮다. 나는 손을 뻗어 침대를 더음어 핸드폰을 쥐어 폴더를 열었다. 부재중 통화 한 건. 그가 사과를 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기대감에 차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그러나 모르는 번호였다. 뒷번호가 낯이 익었지만 누구의 번호인지 전연 알 길이 없었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 번호-부재중 전화의-였다.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혹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일까 싶어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그러나 답이 없다. 침묵 가운데 깔깔거리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회사는 아니다. 누구지. 나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다시 한 번 더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지만 낯이 익은 번호였다.

 

  "누구세요?"
   「……나야.」

 

  눈초리가 가라앉았다. '그'였다. 이 번호는 또 뭐야? 내가 물었고 그가 허탈하고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밭고 마른, 침잠된 웃음이었다.

 

  「아내 핸드폰을 잠시 빌렸어.」

 

  아내의 핸드폰? 나는 발신 번호를 재차 확인했다. 아.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낯이 익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0357. 그의 아내의 핸드폰 번호와 그의 핸드폰 번호는 맨 마지막 뒷자리가 똑같았다. 아빠, 누구야? 천진한 계집아의 목소리가 대뜸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답한다: 「가은이가 모르는 사람이야. 조금있다가 놀자, 가은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더니 나직이 말했다. 갑자기 조용해 진 것을 보니 장소를 바꾼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아까 전엔 미안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폭력은 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미안하다.」
  "폭언은 괜찮고?"

 

  내 말에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은 목소리로 그가 답한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마. 나 맞아도 싼 거 맞아. 당신이 날 패도 나는 할 말 없어."
  「미안하다.」

 

  나는 그가 연신 중얼거리는-고장난 축음기처럼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왔다. 찬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쿵쾅대던 심장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 심박수를 가라앉혀 갔다. 나는 하얀 베란다에 어울리지 않는 파란색 테이블과 의자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의 위에는 갈빛의 작은 화분 하나와 말보로가 얹혀져 있었다. 말보로는 흡연자인 그를 위해 이따금 한 갑씩 사놓았던 것이었다. 나는 흡연자가 아니었지만 갑자기 담배를 입에 물어 보고 싶은 충동에 휩쌓였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아직도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장황하고 길게 풀어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미안한지, 어째서 화가 났었는지에 대해. 그는 그러나 나와 이에 대한 합리화와 타협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성정이었다. 그는 핑곗거리를 댈 망정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때문에 집사람 핸드폰을 잠시 빌렸다.」
  "……아, 잠깐만. 뭐라고 했어?"

 

  중요한 얘기를 놓친 것 같아 그의 말을 흘려 듣다 되물었다. 그는 체념이 담긴 어조로 내 말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네가 날 수신 거부자 목록에 등록해 놓았잖아.」

 

  나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언제 이래놓은 거지. 스팸 번호 목록에 그의 번호가 들어있다. 스팸 메일함에는 그의 문자가 10통 가량 들어차 있었다. 대체로 전화 좀 받아줘, 내지는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고로, 그는 문자를 보내고 전화도 걸었지만 내가 그의 핸드폰 번호를 스팸 번호로 지정해놓곤 그걸 잊어 버리는 바람에 문자도 전화도 받지 못했다는 소리다. 진짜네. 미안해. 잊고 있었어. 내가 말했고, 뭐? 하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정말로, 잊고 있었어."
  「세상에.」

 

  그의 허황한 목소릴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쥐고선 만지작거리던 말보로를 내려놓고 문득 화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릇푸릇한 잎사귀의 로즈마리다. 그와 나의 교제를 기념해 우리가 하루 되던 날 구입했던 로즈마리. 여러 갈래로 돋아난 첨탐 같은 줄기의 그 끄트머리엔 붉은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양육권은 어떻게 되었어?"
  「……아내가.」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그래? 그렇게 무의미한 되물음을 입 밖으로 내며 나는 로즈마리의 잎사귀 하나를 꺾어 코에 갖다댔다. 진하고 은은한 향기가 비강을 한 번 돌고는 사라진다.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기실 결혼이라는 그 관계의 추상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결혼이라는 건 말이다. 진정 그네를 사랑한다면 나는 하룻밤의 꿈을 꾸리라. 그리고 이 촉수에 엉겨 우리가 공멸하기 전에 그네를 놓아 주리라.

 

  「─야, 나는……」
   "응?'

 

  나는 전화선을 타고 흘러간 내 목소리가 어떻게 변조되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갑작스레 그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는 날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공멸을 원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당위성에 뜻을 부여하는 것을 잊은 채, 그는 그저 사고 않는 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과연 현명하다. 그것은 그러나 내겐 아무런 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네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의 말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지구를 떠나 어딘가의 운하로 도망을 치고 싶었다.

 

 

 

  그의 도덕성은 갉아내고 긁어내면 다인 표피층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런 이가 아니었다. 그는 신사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정한 틀 속의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기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아주 조금이지만 스스로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도 위태롭지 않은가. 사내는 늘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고, 그로선 이혼이라는 결정이 아마 마지노 선에 다다른 선택지였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버린 것들을 강조하며 내게서 사랑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려 할 지도 모른다.

  베란다의 바람이 선선했다. 유리 미닫이 문 너머로 바라본 거실의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테이블 위의 말보로를 집어 들었다. 마치 적장의 목을 베는 기사인 체 긴장해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곤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베란다 밖으로 떨어뜨렸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밤이 깊어 손바닥만한 말보로 담배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마치 시체를 유기한 것만 같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기이한 일이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진공청소기의 소음이 멎을 때까지 그의 집 현관 앞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저 막연히 떠올렸다. 이 아파트 이렇게 방음이 안 되었던가, 하고.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그의 집에서 뒹군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윙하는 청소기의 소리가 멎고 5분 정도가 흘렀음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잠깐만, 열어줄게, 하고 그는 제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인터폰이 간헐적으로 치직거렸다. 나는 그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구두를 벗어 현관에 정돈해두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혹은 맨 처음- 들렀던 때 신발장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그의 딸의 분홍색 리본이 달린 구두가 사라져 있었다.

  아, 정말로 이혼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류에 서명을 했다 내게 알려준 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그는 벌써부터 별거하고 있었다. 나는 콘솔 위에 그가 엎어둔 것으로 보이는 액자를 들추었다.

 

  "딸이랑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봤었는데,"

 

  액자 속에선 단 한 번도 마주한 기억이 없는 여자와 앞니가 빠진 계집아가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액자를 덮어두었다. 굳이 묻지 않았음에도 그는 입을 열었다.

 

  "없더라고."

 

  사진기는 늘 내가 만졌으니까 라고 흘러가는 말로 뇌까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그가 늘 가족의 액자 속에서 제 3자였다면…… 나는 어쩌면 그를 동정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불길한 상상을 애써 고갤 저어 떨쳐냈다. 어디 불편해 라고 묻는 목소리는 나긋하고 상냥해서 안타까웠다. 나는 이제 그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이건 고질적인 병이었다. 나는 늘 사내의 품에서 늘 철새일 수 밖에 없었다. 매번 지긋하리만치 떠올린다. 이번엔 정착할테다 라고 오기로운 목소리로 다짐할 적마다 그것을 비웃는 속내는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적 충만감이나 육체적 관계에 따르는 만족감은 나의 본능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상냥했고 (밤일은)성실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러나 이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다. 그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안타깝다. 그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선배는 일이 커지면 도망가 버리잖아요.

 

  이제껏 기억 속에 남아있는, 10년 전 사귀었던 첫 연인이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의 첫 연인은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 친구였다. 그녀는 얼마나 다정多程하고 상냥했던가. 나는 연애에 있어선 퍽 쑥맥이었으니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는 학과 동기들과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와 약 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었다. 맨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게 건넨 말은 그러나 상냥한 이별의 문장을 빙자한, 날카로운 날의 힐난이었다. 도망. 그 단어는 아마 나의 본능-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리라.

 

  "사진 찍을래?"

 

  그의 손에는 플라로이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정녕 나를 저 조막만한 필름 속에 박제하고픈 것일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안 찍어도 괜찮아."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를 더욱 세게 끌어 안으며 속삭였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온기를 남겨 주고팠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릴 그에게, 짧고 얇은 레퀴엠을.

 

  "……하기사 언제든지 찍을 수 있으니까."

 

  나는 차마 그에게 부정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 흔하디 흔한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시큼한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새벽은 차가웠고 어둠은 날카로웠다. 나는 소리 없이 그의 품을 빠져나와 옷을 챙겨 입고 구두를 꿰어 신었다. 현관문의 문고리는 묵직한 감촉을 남기며 손을 떠나갔다. 그의 아파트 엘레베이터의 구석에 몸을 기대고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그의 집 비밀번호를 잊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적어도 그 첫자리라도 잊기 위해 몇 번이고 엉뚱한 숫자를 중얼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무의식 중 바라본 베란다의 탁자 위에 말보로는 더 이상 자리하고 있지 않다.

  로즈마리의 붉은 꽃망울은 이미 개화해 있었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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