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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1 [맥윌]
  2. 2013.12.10 강리
  3. 2013.12.10 나쁜 버릇
  4. 2013.12.10 교살
  5. 2013.12.09 [레그멜키] 안락사 2
  6. 2013.12.09 [우닝워켄] 돌연 나타나다

2013. 12. 11. 11:52

[맥윌]

  "하지만 아저씨는 분명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디의 말에 윌슨 퍼시발 힉스버리는 손에 들고 있던 각설탕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알토 플룻과도 같은 목소리를 가진, 자신을 응시하는 소녀의 동공은 허하게 비어 있었다. 아비게일이 사라졌어. 그때 우리가 본 것은 환상이었을까? 그녀는 한동안 처량한 목소리로 윌슨의 옷자락을 그러쥔 채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녔었다. 윌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두 인형을 만들기 위해 잘라냈던 수염은 다시 자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웬디도 그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성장하지 않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그곳에 떨어졌던-분명한 타의였지만- 것은 결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수염이 자라지 않는 것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윌슨은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끝없이 검은 입사귀가 나리는 언덕배기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비어버린 웬디, 불타 죽은 윌로우, 어둠 속에서 사라진 위커바텀 부인, 죽지 못하는 웨스(와 벌루노맨시), 그리고…… 그리고 그는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웬디만이 이따금 그를 찾아올 따름이었다. 윌슨은 기다림을 알았다. 웬디를 그런 그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윌슨은 손에서 연장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 그곳에 있니? 내 심장을 쪼아 먹는 저 까마귀 떼의 부리들을 치워내! 이 구멍은 내가 들어가기엔 너무 작은 것 같아. 저 돼지를 죽여! 그리고 피를 뿌려! 웬디는 꿈속에서 계속해 소리쳤고 맨 처음 윌슨은 그녀를 악몽으로부터 건져내다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는 웬디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웬디의 입을 막고 자신의 귀를 막는 대신 그녀의 삐죽이 튀어 나온 결이 좋지 않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면 그녀는 이내 고롱이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었다. 맨 처음 맥스웰을 만났던 때를 떠올린다. 자신은 연구 중에 있었다. 터져나간 스포이드와 유리마저 녹이는 용액들이 즐비한 작업실의 공기는 혼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의 꾀임에 넘어갔다. 애초에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가정하는 것은 이제와 무의미한 짓이 되어버렸으나 미련은 끊임이 없었다. 소녀들과 소년들의 목을 베고 피를 쥐어짜내는 것을 맥스웰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목빛을 띠는 바닥은 기실은 코팅되지 않은 나무 바닥에 스미운 핏자욱이 만들어낸 빛깔이었다.

  조금 곤란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자신의 작업실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낡은 라디오는 나긋한 그의 음성을 실어 날랐다. 전파 따위가 줄 수 있는 감촉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은 웬디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이 그곳에 있었다. 맥스웰을 자신들의 세계로 이끈 것은 다름아닌 윌슨 자신이라고. 이것은 그네들이 살아 숨쉬는 한 끝까지 지켜나가야만 하는 비밀이었다.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용서해 줄 이는 그 누구 하나 없었다. 금지된 주술을 알려주도록 하죠. 윌슨은 손을 뻗었다. 금단의 사과는 색이 붉었고 달큰하기까지 했다. 지식에 굶주리고 기갈 들린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사과를 얻기 위해 긍종하고 따르는 것 뿐으로, 그는 후에서야 자신이 그의 명령으로 만들어낸, 자행한 금지된 주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맥스웰의 문Maxwell's Door. 맥스웰을 자신의 사냥터로 부르는, 앨리스의 토끼굴. 그곳은 자신이 들어가기엔 웬디의 말처럼 너무도 작았다. 윌슨은 그 문이 자신의 세계과 그의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임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으로 홀린 듯 레버를 잡아 당겼던 때, 실제로 그가 보았던 것은 소름끼치는 맥스웰의 미소였고 광소였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윌슨은 어느새 티 테이블 위에 얼굴을 처박고 잠은 웬디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어째서였을까. 그 악마의 농간에 어째서 우리들은 놀아난 것일까.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후 조사해본 바로는 맥스웰은 맥스웰이 아니었다. 그는 무대 연기자인 평범한 사내였다. 그 사실이 더욱 두려이 다가왔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영국인, 평범한 연기자. 그런 그가 결핍된 이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살아 남기를 강요했다. 지독한 그들의 적대자antagonist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우는 것만 같아 머리를 쥐어 뜯자 사특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익숙하다. 환청은 현실감이 있었다.


  "당신, 별로 좋아보이질 않는 군요."

  "그만 둬. 이젠 지긋지긋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인정해야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악마 새끼!"


  기어코 욕설을 토해낸 윌슨은 꿈질대는 웬디를 바라보곤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등 뒤를 돌아봐선 안 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무언가 다른 듯도 싶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이 뺨을 간지럽힌다. 소름 끼치는 체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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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0. 14:05

강리

 강리. 성이 강이고 이름이 리. 사람들은 보통 강리나 강 선생님하면서 부른다. 시원시원하게 자른 머리카락. 약간 억센 턱. 짙은 검은 머리. 속쌍꺼풀에 폭이 좁고 위아래로 올망하게 떠진, 결코 크지는 않은 눈. 유약한 인상은 아닌데 전체적으로 강아지상. 피부는 적당하게 그을렸지만 시커먼 편은 아니다. 키는 아마 178cm 정도. 그래도 한국인 남성 치고는 그럭저럭 장신에 속하는데, 역시 본인은 별 생각이 없다. 사랑과 기대를 담뿍 받고 자라 타인에게 미움 받는 것에 썩 익숙하지 못하다. 웃으며 얼버무리고 일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에 없는 사과도 수 천 번 수 만 번 그냥 하는 편. 자존심이 없다는 비약적인 설명보다는, 단순히 타인의 입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이 커지고 귀찮아지는 걸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사건이 터지면 발벗고 나서기는 한다. 이 역시 근본적으로 보면 이 이상 귀찮아 지는 게 싫은 것 뿐. 문제는 본인이 사과받아야할 일도 건성으로 넘어가다보니─.

  개인적으로 굴릴 떄는 농촌에서 선생질을 하는 입바른 양반이었는데, 메이시어티브의 세계관에서는 선생질하다가 웃으면서 사람 쏴 죽이는 애가 됐다. 물론 입바른 설정은 그대로다. 사실 과거가 있는 캐릭터가 확실히 굴리기 편해서. 강리와 재민이 같은 경우에는 너무 무난해서 나조차도 못 겪어본 삶이라. 사랑 받은 걸 어떻게 얘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제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정작 블로그에 조각글만 흩뿌려 놓고 정리를 한 기억이 없어서 일단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만이라도 모아둠.






1

  바로 그날 그의 눈 앞에서 자그마하던 그 새는 날아올랐다. 꺾여 버린 다리를 절뚝이며 끝내 추락해버린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신파극 마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강리는 허하게 비어 버린 손을 옹송그려 가슴 께에 품었다. 그는 그렇게 단내 나는 한숨을 떨구어 내고 미련을 즈려 밟아 흩뿌리었다. 어디선가 짹짹이는 소리가 들려오이다. 어디선가, 어디선가. 강리는 마침내 뒤돌아 서 파란색의 페인트가 녹에 절어 깔딱이는 제 집의 대문을 향해 달리었다. 짹짹, 짹짹. 참새인지 종달새인지 알 수 없었던 그 새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었다. 강리는 소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창호지 발린 문을 젖혀 열어 들어갔다. 쌔액쌔액 소리가 요란했다. 들어왔나? 어디선가 제 어미 저 찾는 줄도 모르고, 강리는 그렇게 한참을 불 뗀 아랫목에 수굿하여 눈을 감고 덜덜덜 떨어댔다. 강리는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목이 부러져 죽어버린 새새끼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2

  껄떡껄떡. 뒤축 나간 검정 고무신에 아픈 발을 강리는 구태여 내색하지 않고 꾸욱 참아낸다. 조오기 건넛집 덕진의 악다구니에 퍽 놀라 띤 가슴도 한 몫을 했다. 흘러내린 핏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어기적어기적 밀어 연 대문에선 끼익끼익 참아주기 힘든 소리가 났다. 매미가 울고 땀방울이 몽울지고 더펄가히가 짖는다. 강리는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덕진이와 싸운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 아아. 그러나 그는 결국 떠올리고 말았다. 이제 내일 어떡하면 좋나. 덕진이 놈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 차면 좋을까? 웃으며 등짝을 후려칠까? 코에선 뚝뚝 여태껏 핏물이 떨어지고 있다. 강리는 그렇잖아도 흙먼지에 엉망이 된 하이얀 티샤쓰에 뻘건 코피가 둥글둥글 자리 잡아 가는 것이 퍽 염려스러웠다. 이제 강리는 덕진이 놈을 잊는다. 제 어미에게 내뱉을 변명 한마디가 강리에겐 절실하였다.

 

 


3

  감각感覺. 명사.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간단한 이야기다. 뭐야, 이건. 하얀색 마우스 커서가 닿은 검색창이 틱이라도 가진 듯 쉼없이 깜박인다.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단어 옆의 스피커 버튼을 누르자 늘어진 고무줄 같은 목소리로 성우가 단어를 발음한다. 가암─각. 강리는 턱을 괸 채 빼딱한 시선으로 간헐적으로 커서와 함께 명멸하는 모니터의 화면을 바라본다. 손끝에 닿는 마우스의 무기질적인 버튼은 고장이 나 검지에 힘을 주고 꾸욱 눌러야만 달칵하는 소릴 내며 클릭이 된다. 짜증이 나 무선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서야 아차하고 호들갑을 떨며 마우스를 보듬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빼고 강리는 방 안을 둘러본다. 엉망이다. 이곳저곳에 쌓여 있는 편의점 도시락과 노오란 테이프를 붙여 연명하고 있는 빨랫대, 연결 부위가 고장나 골든버그 장치처럼 기묘한 각도로 선을 뒤틀어야 불이 들어오는 핸드폰 충전기도 죄다 정상적이라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굳이 멀쩡한 걸 꼽으라고 한다면 며칠 전 서혁이 고쳐주고 간 앉은뱅이 책상뿐이었다. 본래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는 편이긴 했지만 학생 시절엔, 그러니까 적어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부모에게 손을 벌리고 살았느냐를 책망 받는다면 솔직히 말해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자신이 벌 수 있는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였고 오피스텔도 학비도 모두 부모님의 돈이었다. 서혁은 못질을 하면서도 가재도구들 꼬라지를 보며 기함을 토해냈지만 지금의 강리에게 허투루 쓸 수 있는 돈이란 없었다. 보험사 측에서는 부모님의 사고 이후 제법 면밀한 조사를 나왔고 마지막엔 부모님의 죽음을 자살로 몰아가며 보험금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거기다가 부검 결과는 자살이나 사고사라 칭할 수 없을만치로 애매모호함 투성이였다. 아니, 사고사는 틀림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보험사와의 싸움으로 허비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 싸움이라는 것도 제법 일방적이었던 탓에 법학과와 의료 계열에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나갔을 상황이었다. 부모님의 핸드폰 요금 고지서나 연금 우편물 따위가 집 우편함에 그득 꽂혀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분은 거지 같았다. 국문학과생의 머릿속에 그런 단어밖에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거지 같아서 사람이 화가 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장학금을 받던 대학은 학비가 아니라 심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반 년을 남긴 채 자퇴하고 말았다. 불알 친구랄 것까진 없지만 오랜 친구여 왔던 서혁과 대학에 올라와 3년이라는 기간을 사귄 1살 연상의 여자 친구는 자신을 뜯어 말렸으나 강리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강서혁이와 그때의 여자 친구가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던 건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 자신을 더 격렬히 말렸어야 했다. 강리는 키보드에 머리를 박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실업자와 실업 예정자 많고 일자리는 부족하다. 방금 '감각'이라는 단어도 고용 사이트를 뒤지다 찾은 '감각적인-' 따위의 카피 문구에 커서를 올렸다 툴바에 저장된 국어 사전이 대뜸 팝업 창으로 뜬 것뿐이었다.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지."


  자퇴가 아니라 휴학을 했어야 했다. 차라리 조금 더 버티다가 졸업 예정자가 됐으면 취직이 더 쉬웠을 거다. 자퇴 신청이 이걸로 세번째라 재입학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정신머리가 깨지든 말든 몇 천 원 되는 학비 내고 대학에 붙어 있어야 했는데. 이제 와 후회한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속이 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 Messiative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마데우스의 물음에 강리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별 일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죽상이야? 새로 사귄 여자 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 너무도 그다운 물음이었다. 섹스는 커녕 키스조차 하지 않은지 근 2년이 넘어가는데, 여자 친구 따위가 있을리만무했다. 더군다나 이런 근무 환경에서 교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것 또한 고행일 것이 뻔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강리는 세 명의 여자 친구와 적어도 번갈아가며 일주일에 한 번 뜨거운 밤을 보내는 아마데우스를 존경할 용의가 있었다.


  "팬셔가 갈궈요. 진짜 미친듯이 갈군다니까요?"


  봇물 터지듯 시작된 상사의 험담에 아마데우스는 허리를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팬셔의 비밀을 알려줄까? 라며 속삭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한테 비밀이고 약점이고 무슨 소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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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0. 12:09

나쁜 버릇

 그런 거야, 결국은 그런 거야……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단지 그런 것이었다. 뜨끔뜨끔이라고 해야할지 시큰시큰이라고 헤야할지 알 수 없는 통증이 척추를 찌르르 울리며 타고 올라왔다. 번듯한 것이 거슬려 왼쪽으로 몸을 돌챠눕자 통증을 그 강도와 면적, 또 깊이를 더욱 우심케 한다. 끔찍하고 아뜩했다. 눈을 감고 귀를 세워도 문밖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어두웠지만 때문에 오드콜로뉴의 향취로 지금 누워 있는 곳이 그의 침대임을 알았다. 커튼을 친 창 너머로 붉고 하얀 헤드라이트들이 이따금 명멸했다. 차라리 잠 드는 것이 나을 거라는 걸 진즉 깨닫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웅크렸으나 클락션 소리가 뇌수를 뒤흔들고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이불은 아마 소용돌이 내지는 장미 봉오리처럼 말려 들어가 있었으리라. 추위에 오한이 일고 소름이 돋았다. 불구하고 흐르는 식은 땀에 옷과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면 이내 더욱 추워졌다. 벽과 침대가 맞물리는 부분에 몸을 대자 마치 모래 시계 속의 유사처럼 스스로가 그 틈사구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몽롱하고 나른했다. 굳이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열에 들떠 있음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너무도 당연해 서러울 지경이었다.

  연우가 보고 싶었다. 마음껏 호곡을 터놓고 토해낼 수 있는 연우. 그는 아마 또 어딘가의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지도 몰랐다. TV가 있는 거실의 피아노는 칠 수 있는 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리지 못했다. 그러면 이제 그를 마음껏 원망할 수 있다. 내게 힘이 되어주겠다 하였으나 한없이 무관심한 연우는 나쁜 녀석이었다.

  얼마 간을 뒤척였는지 알 수 없었다. 엉덩이 께의 시트, 아니, 매트리스가 눅눅한 지경이 되어서야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붉게 헐어 있을 것이 분명한 아누스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녹진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다물어지지 못한 채 반쯤 열린 그곳은 차가운 손가락이 닿자 반사적으로 움츠러 근다. 끈적하게 중지에 묻어난 것이 그러나 무엇인가는 어둠 아래 제대로 분간해낼 수 없었다. 피든 정액이든 냄새를 맡거나 핥아볼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뒤에 힘을 준 채 몸을 일으키자 벽면의 희미한 푸른 빛을 내던 전자 시계가 아득하게나마 시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실금처럼 뜨고 있던 눈을 더욱 찌푸리며 더듬더듬 시간을 읽어 나갔다.

  11:23 PM THURS……

  얼마가 지나지 않아 금요일이 될 터였다. 안심하고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바릊댔다. 연우는 저녁 9시에 집을 나서 새벽 4시 즈음에야 돌아오는 올빼미였고 연화는 아마 오늘 만큼은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다 한 반 굴러 떨어지고서야 가까스레 문설주를 붙잡고 허청이는 다리를 다잡을 수 있었다. 금세 뒤가 화끈하게 저려왔다. 축측하게 젖은 바지와 속옷을 벗어 손에 들고 거실로 이어진 방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욕실로 가기 위해서였다.

  절름발이처럼 절뚝대며 한쪽 다리를 거의 끌다시피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선뜩한 감촉을 남기며 타고 흘러내렸다. 이번 주 빨레 당번은 나였던가. 아니, 연우였다. 아아…… 그랬던가?

  손에 든 옷가지들을 빨레통에 처넣고서야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소가 흘렀다. 이 집을 떠나기 위해 챙겨야 하는 짐들에는 무어가 있을까로 급작스레 전개되는 사고에 고민이 되기도 했다. 챙겨야 하는 것…… 막상 곱씹자니 내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떠올랐다. 나 자신조차도 나의 것일 수가 없는데 그것은 제법 어리석은 자문이다.

  욕실의 리놀륨 타일 위에 바지와 속옷을 팽개치고 위에 걸치고 있던 박스티를 벗었다. 샤워기 아래 멍청하게 서 있다 물을 트는 바람에 찬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 펄쩍 뛰었으나 이내 흠칫하고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이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중지를 아누스 속으로 밀어 넣었다. 머릿속은 식어 있었고 흥분도 없었다. 그저 쓰라리고 따끔거렸을 따름이다. 손 끝으로 내벽을 눌러 밀고 갈고리처럼 긁어내자 엉긴 정액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채 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간 그것들은 산화된 피 때문에 약간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쭈그리고 앉자 드러난 허벅지에도 멍 자국들이 선연하다. 그제야 확신하게 되었다. 그건 강간이었다. 연화가 싸질러놓은 정액들은 끊임없이 나왔다. 그는 분명 내가 기절하고서도 나를 범했으리라. 수치심에 앙다문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샤워 부스의 우리에 부옇게 서리는 김에는 혼곤함이 더해져 간다. 결국 바닥 위에 주저 앉은 채 옹송그리고 말았다. 뒷목을 두드리는 물줄기가 간헐적으로 강해졌다 약해졌다는 반복한다. 목줄기를 틀어쥔 채 비명을 지르려는 입 속에 그는 제 손가락을 쑤셔넣지 않았던가. 그것은 종족 보존의 욕구보다도 지독스러웠다. 분하고 오욕스러운 속내는 그러나 점차적으로 얼어붙어 갔다. 흐르던 물이 몹시도 유연하게 배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그저 그것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뜨겁다. 머리카락의 끝에선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형용해낼 수 없는 민충함 내지는 무의식이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장인하! 정신 차려, 장인하!"


  아득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꿈결에서 들리우는 것과도 같이 낯설어서, 나는 도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내 어깨를 쥐고 흔들가 뺨을 꼬집었다. 눈꺼풀은 열기에 반하듯 추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뺨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고서야 가까스레 파르르 눈두덩이를 떨며 개면할 수 있었다. 시야는 마치 급작스러운 역광이 든 흑백 사진처럼 기묘한 콘트라스트를 남기며 다시 상을 담았다.


  "정신이 들어?"


  그는 연우였다. 하지만 나는 연화를 부르려 했다. 연화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일그러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연화를 빼닮은 연우. 연화의 이름이 계속해 내 입속을 맴돌았다. 입술을 떼는 그 순간 그러나 내 속에 들어차 있던 모든 언어들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들은 이내 울음과 신음으로 화했다. 서러웠지만 슬프지는 않았는데, 기이하게도 연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연우의 셔츠 셔츠 자락을 잡아 당겼고 연우는 내 머리를 껴안았다. 샤워기에선 계속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끔찍한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묻은 연우의 목덜미에선 퀴퀴하게 젖은 담배 냄새가 났다.


  "연화야…… 연화야아……"


  연우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 그랬느냐고, 내가 그렇게 미웠냐는 연화를 향한 원망 섞인 모든 나의 중얼거림에도 연우는 등을 토담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러면 더욱 서럽게 울었다. 연우는 마치 위로하듯 내 등을 쓰다듬으며 연신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일견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이상해. 네가 강간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애써 그 말을 삼켰다. 마침내 진이 빠져 반쯤 정신이 혼미해졌던 때, 연우가 조심스러이 나를 안아올렸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나는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늘어져 있었다. 수마가 계속해 몸을 집어 삼킨다. 연우는 제 품에서 간헐적으로 꿈질대는 나를 고쳐 안는다.


  "……씻어야 돼."

  "내일 씻어. 많이 지쳤잖아."


  연우는 끊임없이 물을 뱉어내던 샤워기를 끈다.


  "정액은 뱃속에 오래 두면 배가 아파."


  정액이라는, 약간은 노골적인 내 단어 선택에 그는 잠시 멈칫했으나 그도 정말 잠시였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그도 나도 정말이지 형편없이 젖어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사실이 내게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마치 나로 하여금 스스로가 포태되어 있는 자궁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양수…… 그리고 갓 빠져나온 갓난아기 따위의…… 그러나 무용한. 샤워기를 끄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발작하듯 떨기 시작했다. 연우가 수건으로 몸을 물기를 닦아내도 저항 한 번 할 수 없었다. 그의 손길은 사타구니 께에서 한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러나 수건이 항문을 스친 순간 나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씻어내야만 한다는 강박감. 연화가 내게 남긴 흔적 따위는 씻어내야만 했다. 연우에게 굴욕적인 치부를 드러낸 듯한 이 기분은 도모지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만 둬!"


  연우는 욕실을 나와 나를 안은 채 방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고 나는 욕실의 문고리를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스스로조차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알지 못했을만치로 그악스러운 악다구니였다. 기겁한 연우가 내 손을 겹쳐 쥐었다. 연화가 내 뱃속에 싸질러 놓은 정액 따위로 배앓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면 너는 이해해줄까. 네 앞에서 너의, 그리고 나의 형과 뒹굴던 그런 내 마음을 너는 알아 줄까. 스스로가 진창에 떨어져 버렸다는 자괴감이 도시 일세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연우로서는 이해해낼 수 없을 것이다. 불구하고 그런 그가 나를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마냥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가볍게 하비어 긁어내기는 했지만 연화의 것이 꿈질대며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연우에게 위안 받고 있는 것일까.


  "죽여 버릴 거야…… 장연화 따위 죽여 버릴 거야……"


  머릿속에선 하이얀 폭죽이 터져올랐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턱이 기실은 나의 것 같지가 못했다.


  "……혼자 설 수 있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는 내 발이 거실 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 놓는다. 꼴사납게도 그의 팔이 떨어지는 순간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연우는 한숨 한 번 내쉬지 않고 나를 일으켜 세워 부툭한다. 그는 불썽사납게 마른 내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 뒤로 넘긴다.


  "꼭 씻어야겠어?"

  "응."

  "……도와줄게."


  그렇게 말하며 나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선 연우는 제일 먼저 세면대 곁의 나와 연화, 그리고 자신의 면도기를 화급히 장에 밀어 넣었다. 나는 그제야 연화가 말한 '도와줄게'가 알량한 그의 공포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임을 할게 되었다. 그는 내가 자살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흔히들 TV나 소설 속의 성폭행 피해자가 그러하듯. 내 최초의 관계가 강간이었다는 것을, 녀석도 연화도 모르는 탓이다. 나는 그것을 애써 모른 체 하며 반대편의 서랍을 열어 피스톤과 호스를 꺼냈다. 관장액은 아마도 연화의 방에 있을 거라는 게 그제야 떠올라 망연히 물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연우는 약간 넑이 나간 표정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나로선 할 도리가 없었다.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연화는 섹스할 때 콘돔 쓰는 걸 싫어해."


  막상 입을 열고 나니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세면대의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연우는 고개를 숙여 내 손에 들린 기구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 싶었다. 단지 눈길만으로.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에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연우를 따가 시선을 내렸으나 내겐 그저 쓸데없는 짓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결국은 연우의 뽀얀 얼굴을 훑었다. 색소가 옅은 눈동자와 조각한 듯한 코 따위가 유난스레 도드라졌다. 그의 너머에서 연화가 보였다.


  "강간이었어."


  최대한 명확하게 그 단어를 발음하려고 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야 용이하리라 믿었는데 끊어치듯, 말끝은 파르르 떨려왔다. 그제서야 내게 무엇인가가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고 말았다. 소리 없는 죽음이 연화로부터 내게로 옮겨 왔다. 그것은 고백에서 오는 수치였다. 연화는 내게 자신의 성벽을 고백했던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그는 당시 그러나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이 지경이 되자 내가 지켜내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전연 알 길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한국에서 이따금 연락을 취해오는 이들에게 김치가 그립다느니 고추장이 그립다느니하며 웃어댄 것과 마찬가지로 연우에게도 방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연화와 나로 한정된 이 좁은 세계가 연원하리라 믿고 싶었다.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미량 저울의 평행을 나 자신과 연화만의 비밀로 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한 집에 사는 연우의 앞에서 이미 써늘해져버린 연인과 포옹을 하고, 또…… 아아…… 그건 이미 연극이었다. 괜한 관객조차 없는 촌극.




  나는 결국 관장을 하지 못했다. 대신에 연우에게 안겨 짐승처럼 울어댔다. 연우에게 사과하고 연화를 저주했다. 그날부터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늘 밤에 나가 새벽에나 집에 돌아오던 연우는 오전 12시가 되기 전 귀가했고 연화는 되려 새벽 6시 즈음에야 소리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열쇠조차 소리없이 돌려 여는 듯 싶었다. 그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혁경이 집으로 찾아와 맥주 한 박스를 갖다주며 농담조로 연화가 일주일 내리 철야를 한 탓에 자기들 할 일이 없어져 큰일이다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가 바나 카지노를 전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바람 비스무리 한 것도 말이다. 그 만큼 그 둘의 생활 사이클은 반대가 되어 있었다. 불구하고 나는 버릇처럼 7시면 일어나 연화와 연우의 아침을 차렸다. 팬케이크를 굽고도 어딘지 석연치가 못 해 냉동 와플과 팝타트를 꺼내 놓고 그로도 모자라 약간은 낡아 뵈는 구식 밥솥에 밥을 지었다. 그러면 그는, 그러니까 연화는 내가 방에 들어간 후에야 문을 열고 나와 그 중 한 가지를 집어먹고는 8시 반 즈음 집을 나섰다. 연우와 나는 9시에 그가 먹고 남은 것들을 다시 데워 먹었는데, 사실 연화는 팝 타트 하나를 데워 가져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연우는 탁자 밑으로 다리를 까딱이며 내 다리를 간지럽히고, 나는 그러면 웃는다.


  "인하야."

  "응?"

  "일하는 데 따라올래?"


  기실 오전, 오후 중 연우는 같은 집 안에 있다 뿐이지 좀처럼 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기에 나는 제법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연우의 닫힌 방문에 귀를 대고 있으면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방 안 벽면과 문에는 마치 계란판 같은, 스펀지 같은 재질로 된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언젠가 그는 그게 형의 히스테리컬한 반응 때문에 스스로(손수) 설치한 것이라 일러준 적이 있었다. 연우는 그가 음악을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연화는 '연우가 하는' 음악을 싫어할 따름이었다. 때문인지 나는 연우가 말하는 '일하는 데'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유명 음대의 휴학생이라는 것과 일을 하러 클럽에 다닌다는 것, 그리고 그의 형의 성벽 따위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날 따라 연우는 방에 박혀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구형 포드를 타고 다운타운의 아울렛에 갔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연화가 준 신용카드를 나를 위한 용도로 썼다. 이미 거기서부터 나는 일탈 비스무리한 것을 감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연화가 내게 허락하지 않았던 찢어진 모양새의 청바지나 얇은 체인식의 목걸이를 연우는 내게 대보며 그것들이 어울리는 가를 엄격히 심사했다. 키들대며 웃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팔에는 쇼핑백 하나가 더 걸려 있었다. 평소라면 사 마시지 않았을 비싸기 그지 없는 스무디를 한 손에 쥐고 집에 돌아왔을 때엔 이미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연우는 그것을 두고 '대단하다'며 웃는다. 그리고 이내 연화가 내게 알려준 것이 근처 차이나 타운으로 가는 길 밖에 없었다는 것을 듣곤 퍽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차피 길을 알았어도 퍼밋이 없어 운전해 가지 뮷했으리라 설명했으나 그는 도리어 애써 그리 설명하는 나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에게 아직 나는 연화의 부속품이었다.

  옷을 다섯 백이나 샀으나 연우가 내게 골라준 것은 그의 옷들 중 하나였다. 담배 냄새가 배일테니 그런 옷들은 언제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갈 때 입으라고 연우는 말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하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내뱉었다. 나는 연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연우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건네준 옷을 받아들고 방으로 가 갈아 입었다. 약간은 캐쥬얼한 느낌은 하얀색 셔츠와 달라붙는 청바지였다. 연우는 옷을 갈아 입고 나온 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옷에서는 희미한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났다.


  "어울린다."

  "너무 단정하지 않아?"

  "괜찮아."


  금욕적으로 보이거든, 하고 그가 웃는다. 그는 내 목에 자신이 걸고 있던 체인형 금목걸이를 빼 걸어주었다. 차피 셔츠 깃에 가려 보이지 않을텐데. 그렇게 말하자 답답하게 채워 잠근 목단추 두어 개를 대신해 풀어 준다. 목덜미에 닿는 하이얗고 긴 손가락에 잠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내 목에 손을 집어넣어 간지럽히는 탓에 자라목 꼴을 한 채 자지러지고 말았다. 마침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몸을 다잡았던 때엔 눈초리에 눈물이 찔금 맺혀 있었다. 클럽은 가까운 거리라고 했으나 새벽에는 지하철이 끊기는 탓에 차를 몰고 가야한다 시동을 걸며 연우가 말했다.

  한국과는 확실하게 많은 것들이 달랐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로며 한산한 가, 드넓은 주택가…… 연우의 단정한 옆모습이 마주 오는 차의 전조등에 역광을 받아 드러난다. 눈을 감자 보랏빛의 잔상이 눈꺼풀에 각인되는 듯 했다. 중간에 노루인지 사슴인지가 도로에 뛰어들었던 것을 제하면 별 탈없이 우리는 클럽에 도착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트럭이 주차되고 시동이 꺼졌을 때, 거리는 마치 죽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인적이 드물고 어둠이 나앉은 뒷골목이었다. 네온 사인으로 만들어진 간판이 너무 초라하지도 너무 휘황하지도 않게 건물의 입구 옆에 걸려 있었고 그 옆에서 몇몇 인영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늘도 건물도 시커멓게 덧칠되어 있어서 둘을 구분할 방법이란 여윈 낫이나 손톱처럼 하늘에 매달린 달뿐이었다.

  미끄럼 방지 테이프가 붙어 있는 가파른 타일 계단을 더듬더듬 걸어 내려갔다. 이사할 적 엘레베이터 벽에 대놓는 나무 판 같은 걸로 이루어진 통로의 벽면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폭하게 쓰인 글자들이 난무했다. 그것들은 그러나 화장실에 끼적여 두는 낙서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어째서인지 그것들…… 낙서, 아니, 글자들은 이전부터 그곳에 존재해 왔다는 그런 강렬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벽면을 가득 덮은 낙서를 묻어버린 콘서트 팜플렛에 스치우듯 시선을 두었다.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두어 달 가량 날짜가 지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반쯤 그런 것들에 정신이 팔린 내 팔을 연우는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잡아 끈다. 나는 멈칫하다 그를 따랐다. 그러자 이내 학교 강당이나 극장에서나 보았던 육중한 방음문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까닭없이 들뜨고 말았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연화의 손바닥을 벗어 났다는 희열에 지배당했다. 마치 사형수가 자신이 온 길을 되짚어 보듯, 거울로 들어가기 전 앨리스가 자신의 집을 눈 안에 새기듯 나는 뒤돌아 미미한 붉은 빛이 감도는 통로를 응시했다. 문 너머에서 먹먹하고 답답하게 들려오는 이질적인 음악 소리가 그득했다. 연우는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머릴 기댄다.

  결국 그 마법의 문을 연 것은 나도, 연우도 아니었다. 한 무리의 외국인들(그들에겐 내가 외국인이겠지만)이 연우와 내 뒤로 걸어왔다. 그들은 연우를 알고 있는 듯 싶었다. 그들이 장난스럽게 그의 등을 치며 인사를 주고 받는 순간 연우 또한 그들 공동체의 일부임이 내게 드러났다. 괜스레 소외된 듯한 기분에 몇 걸음을 물러서자 눈두덩에 검은 아이쉐도우를 바른 여자가 마찬가지로 검게 칠해진 입술을 열어 빠르게 무언가 말을 내뱉는다. 연우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릴 때까지, 나는 그녀의 말이 나를 향한 것이었는가 알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가 윙크한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연우를 응시하는 순간 뒤에서 한 사내가 내 어깨 너머로 긴 팔을 뻗어 내가 가로막고 있던 문을 밀어 열었다. 나는 우르르 걷기 시작하는 그들 틈에 끼여 꼭 밀쳐지듯 게걸음하며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커튼이었고 그 너머의 무대였다. 어둠 속에서 들쑥날쑥하는 사람들의 머리통 그림자, 역한 땀 냄새와 이와 뒤섞여 더욱 역하게 느껴지는 지독한 향수 냄새…… 사람들의 틈사구니에서 불쑥 튀어나온 하얀 손이 내 손목을 움켜 쥔다.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인하야, 하는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나를 무대 오른편 구석진 자리에 앉혀 놓곤 500mL 들이의 잔에 맥주를 그득 담아 들고 돌아왔다. 누렇고 투명한 액체 위의 하얀 거품은 파라핀으로 만들어낸 모형처럼 현실성이 없었다. 오늘은 내가 집에 없으니 12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 장난스럽게 말한 뒤 연우는 무대 옆에 작게 난 검은 문 속으로 사라졌다. 있는 듯 없는 듯 교묘하게 가려진 문이었다.

  장식품을 바라보듯 탁자 위의 맥주 잔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의 표면에 응결된 물방울들은 무거워지면 잔의 표면을 따라 흘러내렸고 그러다 다른 물방울들을 집어삼키곤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맥주 너머로 희미하게 사람들의 그림자가 오갔다. 곁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요란한 음악에 잔이 이따금 진동하기도 했다. 나는 허리를 수그려 탁자 위에 턱을 대고 사팔뜨기 꼴을 한 채 맥주 속의 세계를 노려보았다. 기포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상승한다.


  "너 혹시 자니?"


  커다랗고 선이 뚜렷한 눈이 노란 세계 안에서 끔버인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눈을 치켜뜨고 도리질 쳤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낯선 여자였다. 그녀는 맥주 잔에 들이 밀었던 얼굴을 물리고 내 옆에 주저 앉았다. 피워도 되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쳐다본 그녀는 한 손에 시가렛 같은 것을 피워 물고 있었다.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후하고 날 향해 연기를 뱉어 냈다. 내가 알고 있던 담배의 향보다는 덜 지독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기묘한 세계에 들어오고 말았노라 떠올렸다. 이런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샘솟는 것도 같았다. 때문인지 나는 제법 대범하게 여자가 건넨 담배를 한 모금 빨아보곤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연기를 뱉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그대로 삼켜버리곤 콜록이자 그녀가 키들댄다.


  "나 기억 안 나?"

  "응."

  "아까 입구에서 너한테 말 걸었는데."

  "아아, 알 것 같아."


  연우와 인사를 주고 받았던 무리에 끼여 있던 검은 화장의 여자였다. 그녀는 코르셋 같은 장식이 붙어 있는 검은색의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케시미어는 아니지만 에딘버러에서 산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거품이 가라 앉고 미지근하게 식은 맥주를 홀짝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대개는 내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지럽게 티미한 불빛이 뒤섞여갔고 시야는 마치 금이 간 듯 이등분되었다. 여자는 내가 잘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곤 점차 말수를 줄여 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렸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고 말았다. 맥주는 어느새 반으로 줄어 있었다.


  "조금만 천천히 말해줄 수 있어?"

  "오, 그래."


  그렇게 답하며 그녀는 계속해 머릴 흔들었다. 꼭 귓가로 다가온 모기 따위를 쫓아내듯.


  "고마워."

  "음, 그러면 어디서 왔어?"

  "한국."

  "북쪽? 남쪽?"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늘상 듣는 말이었기에 별 생각없이 '남쪽,' 하고 답했다. 그녀는 저홀로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그 큰 눈을 도로록 굴리며 조용히 '남한……?'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세팅이 한창인 무대 위를 올려다 보았다. 쿵쾅대는 음악은 계속해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왔고, 파랗고 빨간 불빛들이 산만하게 끔벅였다. 컴컴한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드럼이며 키보드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나사가 하나 빠져 웃음을 터뜨렸다. 끓어버린 냄비 뚜껑이 들썩이듯 포슬포슬 스스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튀어나온 웃음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멜리사는 나와 동갑이었고 연우와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멜리사가 식어버린 내 잔을 테이블 구석으로 밀어내고 자꾸만 새로운 잔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그것을 막연하게 당연시하며 그녀가 내미는 잔들을 있는대로 다 받아 마셨다. 마침내 무대 위의 불이 켜지고 가물하게 아롱졌던 그림자들이 환하게 밝혀졌던 때, 나는 연우가 드럼 연주자와 귓속말을 주고 받는 것을 보았다.


  "아, 저기 있네."


  멜리사가 그를 턱짓했다. 그의 손에는 기타 목이 쥐여져 있었다. 그는 키보드 담당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하이얗게 드러난 그의 목덜미를 응시했고 그 순간 연우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연우는 살짝 손을 흔들었고 입 모양만으로 기다리라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앞에서 사람들이 춤추기 시작했고 마치 라푼젤처럼 머리를 늘어뜨린 금발의 가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 위 조명은 침침하게 변해 나는 더 이상 연우를 눈으로 찾아낼 수 없었다. 연우의 시선 또한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소리를 들었을 따름이다. 바 쪽으로 가 맥주를 2잔 더 가지고 멜리사와 내 앞에 한 잔씩 내려놓았다.


  "헤테로야?"

  "뭐?"

  "내 말은…… 너 여자애 좋아하냐고."


  멜리사가 맥주를 들이키며 내게 물었다. 황당할 정도로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라며 멜리사는 변명하듯, 나를 안심시키듯 내뱉었다. 그녀가 내게 헤테론 물어본 것은 그러나 도리어 그녀가 가지고 있는 확신을 우회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하다 못해 연화가 곁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나를 은연 중 탐색하고 결론을 내린 그녀에 당혹스러움이 덮쳤다. 내가 머뭇거리면 머뭇거릴 수록, 멜리사는 더욱 확신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야."

  "그러면 너 혹시 레인이랑 사귀니?"

  "그게 누군데?"

  "이름도 몰라? 같은 왔길래 친한 줄 알았는데."

  "아, 연우."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랑 사귀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내저어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멜리사는 그러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연우의 동성 연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녀의 시선에 지쳐 토해내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내 형제야."

  "하나도 안 닮았어!"

  "다들 닮았다던데."

  "그런 인간들 눈에 동양인들은 다 똑같아 보일 걸."


  자신의 말에 멜리사는 낄낄대며 웃었다. 사실 그렇기는 했다. 우리들의 눈에 외국인들이 다 똑같아 보이듯, 그들도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무대 위의 연주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고 나는 후에 들은 척이라도 할 수 있도록 불빛 아래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도 얌전하게 기타를 치고 있었다. 과장된 행동 따위 없이 무표정하고 침착한 얼굴로. 그러나 결구 대충 뚱땅거리고 있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과 리듬을 타듯 흔들리는 군살 없는 그의 허리가 마음에 들었다. 애살 없어 뵈는 노친네의 표정이라며 내 나즉한 장탄에 멜리사가 토를 달았다. 그녀는 여자만이 지을 수 있는 특유의 표정으로 나를 재차 응시한다. 여전히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다. 어느샌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시가렛도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홈신 두들겨 곤죽을 만들어 놓은 듯, 어지럼증과 그에 비례하는 미약한 떨림이 전신을 덮치는 바람에 고개를 뒤로 젖히곤 천장을 바라보았다. 본래는 검은 빛으로 추정되는 벽은 이따금 검붉고 검푸르게 변모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도중 곁으로 다가온 멜리사가 내 이마를 짚었다. 시원한 얼음장 같은 체온이다. 잘게 쪼개진 시야가 종국에는 박살나는 것이 망쇄하는 신열 속에서도 느껴졌다. 무대 위의 불이 꺼진 것이 곁시야로 보였으나 아직도 귓가에는 기묘하고 이계적인 타향의 음악소리가, 그 연주가 끊임없이 연쇄되어 이어졌다. 나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닿아 조심스럽게 뒤척이며.


  "재미 있어?"

  "응."

  "얼마 만큼?"

  "해방된 기분이야."

  "울렁거리지는 않아?"

  "전혀…… 아니, 조금……"


  팔을 뻗어 서늘한 손을 조금더 가까이로 끌어왔다. 저항 없이 다가오는 감촉이 달았다. 잔정을 갈구하듯, 기갈이 들린 듯 너를 찾게 되는 나를 알고 있으려나. 침잠하는 몸뚱어리를 건져 올려줄 것은 어디의 블랙홀인가를 고민해야만 하는 나 또한……

  연화야. 왜? 좋아해. ……. 정말이야.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건 누굴까, 인하야…….

  연화는 믿어 주지 않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지? 그 문제에 대해 내가 입을 열라치면 너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입 속에 시큼털털하게 남아 있는 담배의 향내는 마치 떫은 감을 씹었을 때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나는 마침내 비틀대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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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10. 11:54

교살

: 차피 본래 1권의 절반 가량의 분량은 웹 공개고 이건 블로그에 잠시 올렸다가 삭제한 조각글 같은 거라 다시 여기에 백업.






1

 조신하게 문을 두드리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존재가 있다. 헛된 희망과 함께 스러지는 존재가 있다. 누군가는 그것이 미래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투지라 말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이마 위에 얹어 두었던 전공 서적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치워졌다. 역광 탓에 그늘진 얼굴이 누르스름한 잔디밭에 드러누운 최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이현은 그의 손에서 전공 서적을 빼앗아 다시 얼굴을 내리 눌렀다. 콧잔등이 아려왔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노곤함에 젖은 한숨이 입술 새를 비집고 흘러나갔다. 이내 커다란 손이 잔디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최이현은 그제서야 서적을 머리맡에 던져두고 두 눈을 게슴츠레 치켜 떴다. 두피를 마사지하는 거슬리는 손을 쳐내자 이번에는 귓볼을 주욱 잡아당긴다. 박영혁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를 접으며 그가 웃었다. 최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건드리지 마."


  도리질을 쳐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를 잔디밭에 뻗어 있었던가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아롱지는 노을 탓에 스스로가 어느 순간엔가 잠들었으리라 막연히 짐작했다. 등 뒤에서 푸슬푸슬 건조한 박영혁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저를 비웃는 듯한. 무겁게 가라앉은 머릿속이 전연 나아지질 않아 최이현은 세운 무릎에 팔을 두르고 고갤 묻었다. 엉덩이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온 박영혁이 좁은 어깨 위에 제가 걸치고 있던 남색 카디건을 드리운다.


  "강의는 왜 안 들어온 거야?"

  "잠들었어."

  "손질도 안 된 잔디밭에서?"

  "갈 곳이 없었으니까."


  생물관으로 꽹과리나 징 따위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성을 토해내던 인문관 학생들을 떠올리자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1층 과사 앞에 주저 앉아 애국자를 표방하던 멍청이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 제 건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질 않았고 박민재는 기어이 부총대인 최이현을 발견하곤 그악스레 쫓아오기 시작했다. 야, 최이현, 야, 야. 귀머거리인 체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런 때엔 무시가 약이었다. 불구하고 박민재는 기어이 최이현의 어깨를 붙잡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씨발. 빨갱이 같은 새끼. 최이현은 걸음을 멈추고 손민재를 바라보랐았다. 한 손에 들린 자이니콜로지 서적을 들어 총대를 후려치리라 마음 먹었던 때 때마침 박영혁이 등장한 것은 기적이었다. 참아.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뇌진탕으로 바닥에 널부러질 뻔 했던 제 운명을 알지 못한 손민재는 부들부들 떨리는 최이현의 손을 바라보며 계속해 이죽였을 따름이다. 선배님, 그만 하시죠. 박영혁이 중얼거리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너답네."


  박영혁은 이내 덧붙이듯 속살였다.


  "그리고 멍청해."


  딱히 반박할 필요성일 느끼지 못해 입을 다물고 허리 꺾인 잔디만을 노려보았다. 그 또한 말을 않았다. 손을 뻗어 토끼풀의 대가릴 튿어낸 박영혁은 길게 자란 손톱으로 아직 풀빛을 띤 채 웅크려 있는 꽃봉오리들을 하나하나 골라 뽑아냈다. 섬세하고 잔혹한 손길이었다. 그는 아가리를 벌린 봉오리들은 손대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불편함에 최이현은 마침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짓물린 잔디에 축축하게 젖은 면바지가 허벅지에 들러 붙었다. 박영혁은 고개를 들어 그런 최이현을 바라보다 잔디 위에 버리듯 던져두었던 그의 서적을 건내주었다. 책이 몸을 뉘였던 곳의 잔디는 하얀 뒷면을 드러낸 채 죽은 듯 누워 있었다. 해는 가파르게 저물어 갔다. 어느새 흐릿한 윤곽만을 드러낸 박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최이현으로부터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최이현은 드러난 제 팔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리곤 다시금 그의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도 해 그저 아미를 찌푸렸을 따름이다.




2

  "황민욱이 분신했어."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이현의 바삐 움직이던 손이 멈칫했다. 계집아의 것처럼 낭창한 손이다. 박영혁은 그가 필기해 나간 공책 위의 한 부분을 짚으며 선웃음을 지었다. 당연하다는 듯 최이현은 그의 손을 공책 위에서부터 쓸어냈다. 짜증이 배여 있었다. 마치 황민욱이 분신한 것과 제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몸짓이었다. 어린 아이를 채근하듯 박영혁은 최이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박영혁이 달큰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이현은 그의 손에서 제 공책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에 도서관의 이목은 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당혹스러움에 숨을 참는 것처럼 최이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박영혁은 즐겁게 바라보았다.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박영혁이 제게 말을 건넸다는 것이 퍽 당혹스러운 것이리라.


  "그걸 나에게 말하는 저의가 뭐야?"


  최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의중을 떠보려는 속셈이었다면 우습게도 실패였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네가 부산이 아닌 광주나 서울에 있었더라면 분명 그 꼴이 났겠지. 박영혁이 기요틴의 날을 모방하듯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최이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질려갔다.


  "나는 운동이 싫어. 말했을텐데."


  인문부생들이 들으면 기함을 토해낼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최이현은 박영혁의 시선을 비켜갔다. 어디선가 짤그락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잘근대며 씹어댄 그의 입술이 마치 피를 묻힌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알고 있음에도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어."


  박영혁이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네가 운동권을 싫어하는 게 다가 아니겠지. 살짝 올라간 턱 끝이며 끼고 있는 팔짱이 박영혁을 더없이 오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지독하게 검은 눈동자가 최이현을 향했다. 그가 겉켜에 두르고 있던 상냥함은 진즉 죽어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 눈치채고 만 것일까. 차갑게 식어가는 뒷목을 느끼며 최이현은 흉폭하게 날뛰는 박영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나가. 나가서 이야기해."


  최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가방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박영혁의 주먹쥔 손 아래엔, 녹슨 볼체인이 늘어져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군번줄인지, 굳이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는 쉬이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이 최이현을 끌고간 곳은 다름아닌 과 사무실이었다. 잠긴 문고리를 수차례 흔들자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과사 안에서 기어 나왔다. 최이현은 숨을 삼켰다. 잠금쇠가 박살 나 훤히 열린 창문으로 몰아치는 삭풍이 매섭게 사무실을 헤집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던 서류더미가 타일 바닥 위로 추락했다. 넝마 마냥 찢어진 커튼이 거미줄처럼 대 위에 걸려 있었다. 문을 열어준 사내의 발밑에 깔린 학기는 수많은 발자국이 찍힌 채였다.


  "아까보다 더 엉망이군."


  박영혁이 제 얼굴 앞으로 날아온 종이쪼가리를 구겨 바닥에 팽겨쳤다. 제법 거친 몸짓에 사내가 옹송그린 허리를 펴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엉긴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며칠 전부터 강의에 들어오지 않았던 4학년 김상열이었다. 그의 불같은 시선이 최이현을 향한다. 거뭇거뭇하게 변한 눈밑이 그를 시체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일각에서 그가 현세를 비관하고 자살했으리라는 말 또한 떠돌곤 했던 것을 최이현은 기억하고 있었다. 운동권에 짙에 발을 담근 사내의 숨결에서는 고약한 최루탄 내가 나는 것만 같다. 뒷걸음질 치는 최이현의 어깨를 쥔 박영혁이 그를 김상열 쪽으로 밀쳐냈다.


  "2학년 최이현입니다."


  더듬더듬 옹알이를 하듯 내뱉자 김상열이 고개를 번쩍 처든다. 최이현은 도망치고픈 심정을 내리눌렀다. 최이현입니다. 박영혁이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어조로 그를 재자 소개했다. 김상열은 반쯤 미쳐버린 것 같기도, 되려 무언가를 각성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두어 번 터뜨리다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그는 입술을 짓씹고 있었는데, 최이현은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화 백화점 뒤편이었지. 녀석이 3리터 들이 기름통을 질질 끌고 오더군. 그저께인가 경찰들에게 처맞아 성치 않은 다리와 함께 말이야. 정말 말 그대로 질질 끌고오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 반쪽이 푸르딩딩하게 피곤죽이 되어 있었어. 녀석은 한 손에 기름통을, 다른 한 손엔 주먹을 쥐고 있었다."


  김상열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그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던 거야. 모두들 바보같이 그가 제 몸을 불사르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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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2013. 12. 9. 10:58

[레그멜키] 안락사

Euthanasia

131120

Written by Jeongyeon

Redgrave X Melchior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메르키오르는 그것을 가능성의 세계라 명명했다. 여인은 그것을 몰랐고 무구하고도 윤택한 가능성 속 존재하는 저들을 찾는 것만으로도 그는 퍽 벅찼다. 그와 레드그레이브가 함께 존재하는 시대의 가능성은 유한했으나 무한했다. 레드그레이브는 그 끝을 알았기에 그것을 유한하다 명명했고 메르키오르는 일말의 희망에 남은 제로섬 게임에 그것을 무한하다 이야기했다. 그들을 정정해줄 이들이 더 이상 남지 않은 세계에서 그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듯도 보였다. 다직해야 더께처럼 결백치 못할 그의 이야기가 소소한 말장난에 그쳤던 것에 반해 레드그레이브의 언어는 진실이 되었고 규칙이 되었다. 배양된 생명체가 있었고 갈빛 머리의 소녀가 있었고 차분한 미소를 띤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갇혀버린 머릿속에서 수없이 상처받고 수없이 괴로워 한다. 그곳에는 언제나, 또한 소년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바란 것은 그녀의 연인이 존재치 못할 세계였다. 셋은 좋지 못해. 그와 그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그것이 극단이었고 오판임을, 그 가능성을 찾아 헤맨 메르키오르 그 자신조차 자각할 수 있었다. 행복해질 수 없어. 이루어질 수조차 없잖아. 그는 레드그레이브의 발치에서 어리광부렸고 그녀만이 미미하게 웃었다. 아니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어. 끝끝내 그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세계에서는 으레 비극이 일어나곤 했음을 메르키오르는 알고 있었다. 메르키오르? 야살스러운 체 레드그레이브가 장난스러이 웃었고 메르키오르는 고개를 들었다. 참없이 망쇄하는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이건, 분명한 잘못이야. 균형이 어긋나고 말아. 메르키오르. 과오를 모집는 목소리는 결코 매몰차지 않았다. 되려 상냥하고 하나한 친절을 품고 있다. 그것이 가장 그를 비참케 하는 것이었다. 레드그레이브. 메르키오르는 자신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대답. 돌아오는 대답. 네 목울대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 또다시 네가 죽었어. 그는 자수했다. 그럴 리가. 그래서 나는 너를 대신할 존재를 찾고 싶었어. 저런. 나즉한 목소리로 그녀가 웃는다. 밤꾀꼬리가 지저귄다. 하얀 침상 위 식어버린 몸뚱어리가 한스럽다. 그곳에는 그라이바흐가 없어. 그렇다면 그건 이 세계겠구나. 레드그레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까무룩 죽어가는 듯, 검고 검은 잎사귀가 바람에 너울거리듯 파르르 그녀의 입가의 미소가 떠오른다. 여전히 아름답다. 메르키오르는 다시금 더듬대며 입술을 연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도 없어.  아아, 메르키오르…… ─눈을 감은 후 지금의 나 또한 없어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 그녀는 또다시 그 말에 서글프게 웃었다. 그라이바흐는 무엇을 듣고 있을까. 아니, 그는 존재치 않을 터였는데, 분명. 분명히. 레드그레이브는 꼭 그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메르키오르는 그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너절하게 늘어뜨린 두 팔이 제 것 같지 않았다. 눈을 감은 여인의 옆모습에 수심 깊은 정적이 맴돌고 메르키오르는 그녀의 코 아래 손가락을 대 숨결을 느끼었다. 충족되지 못할 서글픔만이 그의 얼굴 그득했다. 스테이시아. 네. 내가 없을 가능성을 찾아줘. 스테이시아는 말이 없다. 고독한 가능성을. 저주받을 가능성을 찾아줘. 나를 사장시켜. 그녀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찾아내. 메르키오르는 딱딱한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녀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나를 묻어. 그녀의 발치에. 그녀의 결 고운 머리채 위에. 나를 매달아줘. 그는 계속해 중얼거린다. 레드그레이브를 보고 싶어. 이런 가짜가 아니야. 모든 것을 아는 그녀가 보고 싶어. 길을 바라. 레드그레이브. 스테이시아는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대답만을 반복했다. 네. 네. 네. 네. 네. 메르키오르는 눈을 감았고 레드그레이브는 개면한다. ……─메르키오르? 소용돌이치듯 그들은 침잠했다. 메르키오르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그는 레드그레이브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참한 동화였고, 그녀를 향한 서정적 염오였다. 응. 메르키오르는 다만 중얼거렸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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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To Appear Out Of The Blue

131208

Written by Jeongyeon

Browning X Walken

 

 

 

 

 

  ─그는 자신을 사장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그 문장으로 귀결된다.

  도시는 음울한 잿빛에 침잠되다 못해 엄몰되어 있었다. 이유 모를 안개가 교량 위 뭉그적 피어나는 것도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흩날리기 시작한 엷은 빗방울에 남자는 결국 구겨진 서류를 코트 속으로 밀어넣었다. 물비린내가 도처에 진동한다. 쑤시는 허리로 남자는 곧 소낙비가 올 것임을 예견했다. 비가 오면 거리의 사람들은 줄어들테고 거리의 사람들이 줄어들면 가게들이 문을 닫겠지. 아마 꽃집도 팻말을 뒤집어 걸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빈 손으로 집에 들어가야할테고 연인은 여전히 화를 풀지 않은 채 문을 걸어 잠그고 제 할 일을 할 것이다. 불행한 회색, 불행한 비. 불행한 기억. 이런 날 만큼은 기어들어가도 괜찮을텐데.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탈길은 백합 문양이 그득했다. 언제부턴가 존재하다 차마 사라지지 못한 채 잔류한 세월흔이었다. 시선의 끝에 머무는 둑을 높다란 파수탑이 꼴아보는 상이고 그 주위에는 빈민가가 있었다. 남자는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주위를 둘러보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둣발은 소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퉁명스러운 배웅을 받으며 거처를 나섰을 때 제 손에 서류 가방 같은 게 들려 있었던 것도 같았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사라진 것이. 또, 옆구리. 날붙이가 선뜩했는데. 그러니까……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수염이 빼죽한 게 강퍅한 턱을 쓸어본다. 면돗날. 아. 아니다. 그는 그제야 시덥잖은 날붙이보다도 써느러웠던, 제 연인의 무기질적인 두 눈을 기억해냈다. 결코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건만 그는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입술을 벌리며 멍청하게 신음했다. 아. 그게 다였다.
  등 뒤의 거리에는 아직까지 사람들이 넘쳐났는데, 반대편의 후미진 골목길은 사람이 없었다. 응집된 음울이 그곳에 굴러다닐 것만 같았다. 남자는 절룩이는 걸음으로 구석에 처박힌 집의 마당으로 들어가 구석에 난 작은 쪽문을 들어열었다. 비쩍 곯아버린 사냥개가 안광만을 형형히 빛내며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짖을 기력조차 없는 것인지 그르렁대는 소리뿐이다. 남자는 저 개의 주인이 아직까지 녀석을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 외외로 신기했다. 계십니까? 의례적인 질문 후에 남자는 없는 대답에도 개의치 않고 구석진 다락으로 곧장 올라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적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요란히도 울어댔다. 비명 같기도 했다. 나무 바닥은 습기를 먹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보풀 같은 곰팡이가 천장 한구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바닥의 먼지도 켜켜이 쌓여 있어 도무지 사람이 얼마 전까지 지냈던 곳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방금 누군가 드나들었으리라고도.

  남자는 자신이 이곳으로 향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마침내 방 앞에 멈춰섰던 때, 남자는 닫힌 나무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금전과도 같이 허울 뿐인 두드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답은 없다. 결국 돌아가려고 몸을 틀었는데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마치 어서 이곳으로 들어오라는 듯. 남자는 둥그런 문고리에 검지를 가져다 대 쓸어보았다. 차가웠다. 작은 손길에도 문은 그러나 쉬이 열리고 만다. 방의 전경이 남자의 두 눈에 훤히 들어찼다. 남자는 한 걸음 물러섰고, 그러자 모든 것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방 안은 누군가와도 같이 정갈했다. 커튼은 싸구려 린넨이었고 책상도 정돈되지 못한 못이 튀어나와 꽤 위협적으로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구둣발을 뻗어 방 안으로 들어섰고 자신의 발치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 뒤 행거에 걸린 코트를 발견했다. 흔해빠진 천자락이었으나 정체만은 명확했다. 남자가 언젠가 자신의 연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던 것이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코트를 쥐었다. 풀먹은 깃이 버석이며 손 안에서 구겨진다.
  찾았으니 이젠 돌아가야겠지.
  허청이는 발걸음을 돌리고서야 순서를 엇갈린 사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등 뒤의 열린 들창으로 예견한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 바닥을 검게 물들이며 들이치는 빗줄기는 소란스럽다. 남자는 자신이 디디고 올라온 바닥을 응시했다. 물기에 검게 염되어 계단 칸칸이 검은 발자국이 그득하다. 의아함에 남자는 코트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자신의 옆구리를 살금 건드려본다. 흥건한 것이 만져진다. 남자는 팔을 들어 손가락을 펼쳤다. 그리고 제 눈 앞에서 천천히 흔들어보았다.

  아아, 아무래도 물비린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이미 검은 빛깔을 띠기 시작한 제 옆구리를 그제서야 내려다보았다. 산화된 피가 끈적였다. 엷은 막이 상처의 위를 덮고 있었던 탓인지 작은 손길만으로도 이내 피를 쏟아낸다. 남자는 행거에서 집어든 코트로 제 옆구리를 동여맸다. 질끈 너덜해진 소매를 동여 묶는 순간 작은 침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지만. 상처를 자각하자 밀려오는 통증은 퍽 가식적이었다. 남자는 미끄러지듯 벽에 등을 댄 채 주저앉고 만다.

  자신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것인지조차, 그는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채였다. 사내는 어느날 갑자의 그의 삶 속에 등장했다. 조직이나 타인을 통해서도, 심지어 남자의 필요에 의해서도 의도된 만남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어느날 어느새 시나브로 스미어 있던 이는 이따금 협착한 방구적의 좁은 들창 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곤 했다. 언젠간 이렇게 되어버렸겠지. 그로선 무책임한 이야기였고, 검푸른 머리카락이 마치 결궤된 바다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남자는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의 옆모습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하이얗게 표백된 가운을 늘 걸치고 있었으나 합법적인 의술을 행하는 이는 아니었다. 이런 구석 바닥이 늘 그러했듯 하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그는 대가를 원치 않아했기에 더욱 적호했고 사람들은 그런 그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기 전까지만이라도 그에게 안주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사내가 떠났다는 사실은 뒷골목의 알 나간 전구처럼 티미한 감흥만을 사람들에게 남기었을 따름이다. 남자는 기억 없는 사내의 이름만을 알았다. 이름. 이름? 이름. 티미한 감흥의 그 이름.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존재를 명명하는 것이 이름이라 이야기한들 저들에게 있어 이름이란 묘석에 줄 몇 자 그을 수 있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사내는 불구하고 한참을 고민해 이름을 묻는 남자에게 너무도 쉬이 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남자는 그에게 그 이름 두 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덕에 이별 이후 이따금 삼고하곤 했다. 사내에게 방을 내준 악독하고 그악스럽던 여주인조차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사내의 실종 이후 사흘이 흘러서였다. 애초 남자와 사내는 그리 달가운 연인 사이이지 못했던 탓이다. 공유하되 공유되지 못한 것뿐이라고 남자는 자위했다.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몸뚱어리를 저주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부지중 저 또한 이곳으로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천려에 젖은. 길들이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다. 정착되지 못할 이들에겐 퍽 아찔하기까지 하다. 남자는 이를 악물었고 배를 움켜쥔다. 복통과는 확연히 다른 고통이다. 왈칵하고 견뎌내지 못한 핏물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다. 예견된 비가 다시금 거세진다. 휘몰아치나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잊기로 한다. 언젠가 상상했던 죽음의 형태였으나 그는 결코 그것에 깊은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도 직감했다. 그는 서서히 미끄러진다. 질끈 묶인 코트를 함뿍 적신 검은 물이 이제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그것들은 죄 검게 변한 바닥 위로 감응했다.

  희미한 구둣굽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남자는 희망에 찬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림자진 바닥으로 시선을 다시금 떨어뜨린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몸뚱어리 위 유일하게 따스한 것이 체액임은 기이한 모순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서서히 고개를 젖힌다. 목울대가 도드라지는 비쩍 마른 몸뚱어리가 삭정이처럼 바스라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가늠하며, 될 수 있는 한 서서히. 조금 더 느릿하게adagio.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몸뚱어리 위로 여상스럽기 그지없던 손을 뻗는다. 브라우닝은 자신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워켄─그리도 검게 젖은 더러운 손이, 사내의 결백한 옷자락을 붙잡았다. 남자가 웃었고─그리고─자신의 귀에는 퍽…… 으깨지고 마는 소음이.

 

 

 

  하얀 손이 창백하게 질린 손을 붙잡았고 사내가 그저 잠시간 울고 말았다.

  그는 시간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그가 그리 방랑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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