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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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2. 14:45

2013년 1월 5일

"처음이었어."

그의 취향대로 쓰기만 쓴 커피를 들이키는 내 속은 새까맸다. 허리 께까지 기른 금발을 묶을 생각도 않고 그는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통증은 없었고, 나는 때문에 더 배가 아려왔다. 하이얀 도기 위에 산을 이룬 각설탕을 한 움큼 쥐어 커피잔에 털어 넣었다. 창 밖은 유채색만이 찬연하다. 건너편 동의 유리창들에 비친 하늘이 구역질 나올 정도로 푸르렀다.

"그랬어?"

그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마치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그랬어. 나는 턱을 괴고 설거지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곡조를 흥얼댔다. 그 흥얼거림은 높아졌다 낮아졌고, 빨라졌다 느려졌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이 떠올랐다. 그는 맨 처음 나를 잡아챘던 때에도 저 노랠 흥얼거리고 있었다. 달그락대는 식기가 고무 장갑 새에서 요란했다. 몸속을 맴돌던 성욕이 분출구를 찾지 못한 채 머리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있잖아," 나는 푸스스하고 짚단 무너지는 듯한 소릴 내며 웃었다. 아누스를 가르며 들어오던 묵직한 그 감촉이 되살아나는 듯도 했다. 약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세제를 수세미 위에 짜내며 나를 뒤돌아 보았다.

"왜 그러지?"

나는 할 수 있는 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그런데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내지는, 우리가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뒹굴던 것은 과연 언제였는지에 관해. 나의 기억은 내가 당신의 위에 올라타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멍청한 꼴이었지만 당신도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홍빛 램프에 당신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나는 분명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만났었지?"

나의 멍청한 질문에 수세미를 문질러 거품을 내던 당신의 손은 멈추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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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박

 

  아름답지만 두려운 것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현존할 것만 같던 내 사랑, 나의 전부, 나의 생명.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숭배하듯 나는 너를 숭배하고 또 사랑했다. 감히 닿지 못할 곳에 자리하고 있던 존귀함이 얼마나 찬연하게 빛났던가. 그를 추억할 방도가 없어 슬퍼했지만, 나는 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대가 내게 남긴 것을, 그대가 내게 토해낸 것을. 와중 사랑을 속삭이고 무정하게 떠나버린 그대- 따위의 철 지난 유행가의 가사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깔깔대며 웃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허히 들려와 고개를 들면 오래된 백열 전구의 필라멘트만이 붉게 물들어 있을 뿐이다. 이미 늦어버린 홍조를 얼굴 그득 띄우며 나는 재차 차가운 손바닥으로 뺨을 식혔다. 소태를 머금은 듯 쓰고 얼음을 뼈째로 삼킨듯 시린 밤이다. 어기적 매트 깔린 협착한 방바닥을 기어 장판의 전원을 켜고 줄을 잡아당겨 백열등을 소멸시켰다.

  내가 둥지를 튼 자취방은 두 명이 몸을 부대끼며 살기엔 너무도 좁았다. 몸을 옹송그려 이불을 덮고 우리 둘은 늘 꿈지럭댔다. 이따금 방충망을 넘어넘어 작은 전구에 달려드는 나방떼가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머리맡에 둔 전공서적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저걸 머리에 넣어 다니면 참 편할텐데' 뿐이었다. 그대가 결혼을 생각치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지나버려 입을 열기도 우습지만, 싸구려 커플링과 시든 장미 꽃다발을 주워 일반 쓰레기에 버린 것은 바로 나였다. 그대가 우리를 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둘 중 그 누구도 수직 관계를 원치 아니했었던 것이다. 어째서일까. 무거운 추가 되어 함께 죽기 위해 발버둥쳤던 나는 부표에 쓸려 이내 심연으로 가라앉아야만 했다.

  그대가 돌아올 자리는 언제나 내 곁에 있지만 그대가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이 못내 종국엔 아쉬움 담긴 울음이 터졌다. 흐느낌이 선율처럼 자리 잡아가는 이 겨울 밤이 고이 갈려 바닥에 깔리기를 소망하는 스스로의 나겁함을 알고 있는가. 비강을 휘젓는 역한 향취에 장판 위를 구르던 몸을 일으켜 힘겹게 변기로 다가가 모든 것을 게워냈다. 한 번 터진 누선은 막히지 않은 채 계속해 눈물을 쏟아낸다. 뽀독뽀독 입술을 짓씹는 이빨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다.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아이가 생겼어.

  해사히 웃음보를 터뜨린 나는 멍청했는가. 그에게선 이따금 독한 장미향이 났다. 손으로 비벼 빨던 그의 하얀 티셔츠에 묻어 있던 립스틱 자욱도 나는 잊지 않았다. 우습지 않나.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내 몸뚱어리조차 아쉬워 하지 않은 채 좁은 문을 건너 나를 버리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에게는 집이 있었다. 내가 지내는 이 슬픈 단칸방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된 집이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아기와 햇살 같은 계집년이 산다고 했다. 그것이 무채색 짙은 현실이라고도 그는 말했다.

  있잖아, 있잖아…… 나는 잠든 당신의 옆 얼굴에 속살였다. 아이가 생겼어. 아이 말이야.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누린내 나는 수건에 닦아내고 다시 방 한가운데에 깔린 장판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눅눅한 이불이 차가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좁은 방 안, 위잉하고 노트북의 팬이 공회전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질척하게 무언가가 장판 위로 퍼져나가 잠옷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고 잠든 그대를 바라본다. 지지직하고 환한 빛을 발하는 전구 내부에서 스파크가 튄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면 우린 곧잘 닭살스러운 연인 놀일 하곤 했는데. 허벅지 위에 무릎을 뉘이고 귀이개로 귀를 파준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애교스러운 말씨를 섞어 떠들고 광대처럼 웃으며.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있잖아, 있잖아. 잠이 안 와?

  내려 앉은 그대의 눈두덩이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렇게나 달아나기 위해 애를 쓰던 검고 깊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고통에 배를 감싸쥐었다. 아가, 쉬잇, 착하지, 쉬잇. 뱌뱌대는 아기의 옹알이가 기분 좋은 산들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나는 그의 다물린 입술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기처럼 옹알옹알댈 것 같은 작은 입술이다. 사랑스럽기도 했다. 몰래 당신을 탐하는 내 자신이 역겨웠지만 당신은 아마 용서해줄 것이다. 뱃구레 너머 아기의 발길질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내 장판을 벗어난다. 멀디 멀게만 느껴지는 노끈을 잡아당겨 방의 불을 밝혔다.

  붉다.

  다리 사이를 타고 흘러내시는 선혈이 너무도 붉었다. 두려움에 가빠져 오는 숨을 다잡고 구석탱이가 처박힌 하얀 꽃무늬 시트를 잡아당겨 바닥을 긁어 닦아냈다. 눌어 붙은 핏자욱이 갈빛 장판 위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내려다 보다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는 끊임없이 내 다리 위를 기어 내려가고 있다. 손에 쥐고 있던 시트를 다시 구석에 집어 던지곤 그 위에 뱀이 똬리를 틀듯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무서웠다. 뱃거죽 너머에서 무엇인가 요동치고 있었다.

  있잖아, 있잖아. 안 일어날 거야?

  그대에게 내뻗었던 손을 다시 갈무리하며 심호흡 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 저 죽은 동태 눈깔이 이제서야 나를 직시해도 괜찮아. 뱃속의 아가가 피를 토해내도 괜찮아. 당신은 이곳에 있었고 나도 이곳에 있었다. 우리에겐 아이가 있었고 당신에겐 과거가, 나에겐 미래가 있었다. 끊임 없이 쏟아져 내리는 하혈 속에서 나는 멍하니 떠올렸다. 그래,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우리는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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