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0. 11:54

교살

: 차피 본래 1권의 절반 가량의 분량은 웹 공개고 이건 블로그에 잠시 올렸다가 삭제한 조각글 같은 거라 다시 여기에 백업.






1

 조신하게 문을 두드리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존재가 있다. 헛된 희망과 함께 스러지는 존재가 있다. 누군가는 그것이 미래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투지라 말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이마 위에 얹어 두었던 전공 서적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치워졌다. 역광 탓에 그늘진 얼굴이 누르스름한 잔디밭에 드러누운 최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이현은 그의 손에서 전공 서적을 빼앗아 다시 얼굴을 내리 눌렀다. 콧잔등이 아려왔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노곤함에 젖은 한숨이 입술 새를 비집고 흘러나갔다. 이내 커다란 손이 잔디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최이현은 그제서야 서적을 머리맡에 던져두고 두 눈을 게슴츠레 치켜 떴다. 두피를 마사지하는 거슬리는 손을 쳐내자 이번에는 귓볼을 주욱 잡아당긴다. 박영혁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를 접으며 그가 웃었다. 최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건드리지 마."


  도리질을 쳐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를 잔디밭에 뻗어 있었던가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아롱지는 노을 탓에 스스로가 어느 순간엔가 잠들었으리라 막연히 짐작했다. 등 뒤에서 푸슬푸슬 건조한 박영혁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저를 비웃는 듯한. 무겁게 가라앉은 머릿속이 전연 나아지질 않아 최이현은 세운 무릎에 팔을 두르고 고갤 묻었다. 엉덩이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온 박영혁이 좁은 어깨 위에 제가 걸치고 있던 남색 카디건을 드리운다.


  "강의는 왜 안 들어온 거야?"

  "잠들었어."

  "손질도 안 된 잔디밭에서?"

  "갈 곳이 없었으니까."


  생물관으로 꽹과리나 징 따위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성을 토해내던 인문관 학생들을 떠올리자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1층 과사 앞에 주저 앉아 애국자를 표방하던 멍청이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 제 건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질 않았고 박민재는 기어이 부총대인 최이현을 발견하곤 그악스레 쫓아오기 시작했다. 야, 최이현, 야, 야. 귀머거리인 체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런 때엔 무시가 약이었다. 불구하고 박민재는 기어이 최이현의 어깨를 붙잡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씨발. 빨갱이 같은 새끼. 최이현은 걸음을 멈추고 손민재를 바라보랐았다. 한 손에 들린 자이니콜로지 서적을 들어 총대를 후려치리라 마음 먹었던 때 때마침 박영혁이 등장한 것은 기적이었다. 참아.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뇌진탕으로 바닥에 널부러질 뻔 했던 제 운명을 알지 못한 손민재는 부들부들 떨리는 최이현의 손을 바라보며 계속해 이죽였을 따름이다. 선배님, 그만 하시죠. 박영혁이 중얼거리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너답네."


  박영혁은 이내 덧붙이듯 속살였다.


  "그리고 멍청해."


  딱히 반박할 필요성일 느끼지 못해 입을 다물고 허리 꺾인 잔디만을 노려보았다. 그 또한 말을 않았다. 손을 뻗어 토끼풀의 대가릴 튿어낸 박영혁은 길게 자란 손톱으로 아직 풀빛을 띤 채 웅크려 있는 꽃봉오리들을 하나하나 골라 뽑아냈다. 섬세하고 잔혹한 손길이었다. 그는 아가리를 벌린 봉오리들은 손대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불편함에 최이현은 마침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짓물린 잔디에 축축하게 젖은 면바지가 허벅지에 들러 붙었다. 박영혁은 고개를 들어 그런 최이현을 바라보다 잔디 위에 버리듯 던져두었던 그의 서적을 건내주었다. 책이 몸을 뉘였던 곳의 잔디는 하얀 뒷면을 드러낸 채 죽은 듯 누워 있었다. 해는 가파르게 저물어 갔다. 어느새 흐릿한 윤곽만을 드러낸 박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최이현으로부터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최이현은 드러난 제 팔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리곤 다시금 그의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도 해 그저 아미를 찌푸렸을 따름이다.




2

  "황민욱이 분신했어."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이현의 바삐 움직이던 손이 멈칫했다. 계집아의 것처럼 낭창한 손이다. 박영혁은 그가 필기해 나간 공책 위의 한 부분을 짚으며 선웃음을 지었다. 당연하다는 듯 최이현은 그의 손을 공책 위에서부터 쓸어냈다. 짜증이 배여 있었다. 마치 황민욱이 분신한 것과 제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몸짓이었다. 어린 아이를 채근하듯 박영혁은 최이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박영혁이 달큰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이현은 그의 손에서 제 공책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에 도서관의 이목은 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당혹스러움에 숨을 참는 것처럼 최이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박영혁은 즐겁게 바라보았다. 시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박영혁이 제게 말을 건넸다는 것이 퍽 당혹스러운 것이리라.


  "그걸 나에게 말하는 저의가 뭐야?"


  최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의중을 떠보려는 속셈이었다면 우습게도 실패였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네가 부산이 아닌 광주나 서울에 있었더라면 분명 그 꼴이 났겠지. 박영혁이 기요틴의 날을 모방하듯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최이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질려갔다.


  "나는 운동이 싫어. 말했을텐데."


  인문부생들이 들으면 기함을 토해낼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최이현은 박영혁의 시선을 비켜갔다. 어디선가 짤그락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잘근대며 씹어댄 그의 입술이 마치 피를 묻힌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알고 있음에도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어."


  박영혁이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네가 운동권을 싫어하는 게 다가 아니겠지. 살짝 올라간 턱 끝이며 끼고 있는 팔짱이 박영혁을 더없이 오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지독하게 검은 눈동자가 최이현을 향했다. 그가 겉켜에 두르고 있던 상냥함은 진즉 죽어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 눈치채고 만 것일까. 차갑게 식어가는 뒷목을 느끼며 최이현은 흉폭하게 날뛰는 박영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나가. 나가서 이야기해."


  최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가방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박영혁의 주먹쥔 손 아래엔, 녹슨 볼체인이 늘어져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군번줄인지, 굳이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는 쉬이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이 최이현을 끌고간 곳은 다름아닌 과 사무실이었다. 잠긴 문고리를 수차례 흔들자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과사 안에서 기어 나왔다. 최이현은 숨을 삼켰다. 잠금쇠가 박살 나 훤히 열린 창문으로 몰아치는 삭풍이 매섭게 사무실을 헤집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던 서류더미가 타일 바닥 위로 추락했다. 넝마 마냥 찢어진 커튼이 거미줄처럼 대 위에 걸려 있었다. 문을 열어준 사내의 발밑에 깔린 학기는 수많은 발자국이 찍힌 채였다.


  "아까보다 더 엉망이군."


  박영혁이 제 얼굴 앞으로 날아온 종이쪼가리를 구겨 바닥에 팽겨쳤다. 제법 거친 몸짓에 사내가 옹송그린 허리를 펴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엉긴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며칠 전부터 강의에 들어오지 않았던 4학년 김상열이었다. 그의 불같은 시선이 최이현을 향한다. 거뭇거뭇하게 변한 눈밑이 그를 시체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일각에서 그가 현세를 비관하고 자살했으리라는 말 또한 떠돌곤 했던 것을 최이현은 기억하고 있었다. 운동권에 짙에 발을 담근 사내의 숨결에서는 고약한 최루탄 내가 나는 것만 같다. 뒷걸음질 치는 최이현의 어깨를 쥔 박영혁이 그를 김상열 쪽으로 밀쳐냈다.


  "2학년 최이현입니다."


  더듬더듬 옹알이를 하듯 내뱉자 김상열이 고개를 번쩍 처든다. 최이현은 도망치고픈 심정을 내리눌렀다. 최이현입니다. 박영혁이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어조로 그를 재자 소개했다. 김상열은 반쯤 미쳐버린 것 같기도, 되려 무언가를 각성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두어 번 터뜨리다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그는 입술을 짓씹고 있었는데, 최이현은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화 백화점 뒤편이었지. 녀석이 3리터 들이 기름통을 질질 끌고 오더군. 그저께인가 경찰들에게 처맞아 성치 않은 다리와 함께 말이야. 정말 말 그대로 질질 끌고오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 반쪽이 푸르딩딩하게 피곤죽이 되어 있었어. 녀석은 한 손에 기름통을, 다른 한 손엔 주먹을 쥐고 있었다."


  김상열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그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던 거야. 모두들 바보같이 그가 제 몸을 불사르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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